아름다운 밤이에요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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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밤이에요

2015.06.01


“아름다운 밤이에요.” 

1991년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미희 씨의 수상 소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상 소감의 보편적인 매뉴얼은 “부족한 제게 과분한 상을 주셔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개 영화감독님 저를 캐스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함께 고생하신 모든 분들과 나누겠습니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우 주연상을 받게 된,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배우가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느닷없이 매우 낯선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이 낯섦에 시상식 MC였던 점잖은 이계진 아나운서조차도 웃음이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참으로 좋은 수상 소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쟁쟁한 후배 연기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여우 주연상을 받은 장미희 씨에게 그날은 평생 기억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상식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도 수많은 스타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었던 그날은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됐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그때는 왜 그렇게 오글거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그 이후 수많은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일상생활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6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한국 대중문화 예술의 발전과 예술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65년 제정된 백상예술대상은 올해로 51회째를 맞이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지난 1년간 방영 또는 상영된 TV프로그램의 제작진과 출연자에게 시상하는 국내 유일의 종합예술상입니다.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서도 멋진 수상 소감이 많이 있었습니다.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악역 연기를 멋지게 소화했던 조진웅 씨는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단지 그것이, 제게는 굉장히 큰 행운이자 영광입니다. 훌륭한 후보 분들을 제치고 이 상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들 앞으로 더 똑바로 관객들과 진심으로 소통해라! 이런 뜻으로 알고 상을 받겠습니다.”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관객들과 진심으로 소통해라’는 말 한마디 속에는 이 배우가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연히 받아야 될 배우에게 상이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다 이렇게 멋진 수상 소감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도 제게 기회를 주신 제작사 아무개 대표님과 관계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아무개 대표님, 또 다른 아무개 대표님, 스태프 여러분, 매니지먼트 후배 아무개 대표님 감사합니다.”라며 예의 바르게 자신을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한 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수상 소감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상식에서 시청자가 알지도 못하는 많은 이름들을 거론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은 왠지 앞서 조진웅 씨가 얘기했던 ‘소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만약에 모든 수상자가 한결같이 “아무개 제작사 대표님 감사합니다. 메니지먼트 기획사 아무개 대표님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고생하신 감독님 감사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얘기 한다면 그 시상식을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 권투경기에서 동양타이틀 또는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선수가 했었던 한결같은 승리 소감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모션 아무개 대표님, 아무개 전무님, 아무개 관장님…….(보통 이렇게 한 스무 명 정도 이름이 나열되곤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15라운드 경기를 마치고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진 상태에서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던 그 모습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이런 유의 소감만 지긋지긋하게 듣다가 어느 날, 홍수환 선수가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히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감과 함축된 기쁨을 표현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많은 국민이 진정한 챔피언다운 소감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배우를 만나는 것은 학술적으로는 ‘유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이라고 합니다. 배우는 영화에서 극중 인물을 표현하게 되는데 관객은 그러한 배우의 모습을 보며 그 배우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에 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역을 하는 배우는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운 존재가 되고 조금 모자란 듯한 역을 하는 배우는 평소에도 모자란 사람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는 그 배우의 평소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수상 소감까지 연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수상 소감이야말로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대상을 수상한 최민식 씨의 수상 소감은 그래서 더욱 빛났습니다. 

“20대 때,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때, 영화를 하고 싶고 연극을 하고 싶다면서 꿈을 키웠던 그 시절의 최민식과 지금의 최민식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부끄럽습니다. 너무 많이 변했고 너무 많이 물들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좋은 작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이런 것부터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그 여백을 끈질기게 붙잡아서 더 좋은 작품으로 여러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도록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날 최민식 씨의 민낯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솔직한 수상 소감을 통해 그가 앞으로도 매우 훌륭한 배우로 남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시상식이 남아 있습니다. 판에 박인 수상 소감이 아닌 대중과 소통하고 진심을 담은 수상 소감으로 이야기가 풍성한 ‘아름다운 밤’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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