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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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2015.05.08


105년 전 1910년 9월 10일,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순절하였습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 끝에 일본의 강제에 의한 을사늑약과 조선병합으로 국권이 멸렬되자, 매천은 울분을 참지 못해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자결했습니다.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겼습니다. 그 중 두 편을 옮겨 봅니다.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바람 앞 휘휘(輝輝))한  촛불이 창천(蒼天)을 비추네

새와 짐승도 슬피 울며 해악(海岳: 바다와 산)도 찡그리는데
근역(槿域: 우리나라를 일컬음) 삼천리강산은 이미 침륜(沈淪)됐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를 회상하니
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가 어렵기만 하네

매천은 서른 살에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의 부패를 개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전남 구례의 향리에 묻혀 책과 함께 살았습니다. 가산을 털어 3천 권의 책을 섭렵한 그는 특히 사학(史學)에 관심을 쏟고 온고지신을 강조했습니다.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우쳐 주고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직필을 남겼습니다.

# 황현이 47년에 걸쳐 집필한 <매천야록(野錄)>에는 기괴한 죽음의 기록이 있습니다. (대양서적 1975년-한국명저대전집)
"1907년 이완용(李完用)은 아들 명구(明九)가 일본에서 유학하는 사이 며느리 임(任)씨를 간통했다. 아들이 돌아와 내실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며느리를 껴안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고 탄식하며 자살했다."
그 후 이완용은 내놓고 며느리를 첩같이 여기며 데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임씨는 장남 승구의 처, 명구는 조카라는 주장도 있음)

이완용은 이전에도 국고 횡령, 공문서 위조, 국가기밀 누설 등 숱한 죄업을 저질렀습니다. 1899년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이 전차화사를 설립, 경성전차 건설을 추진하자 고종에게 을미사변 때 참살당한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까지 한꺼번에 황제와 수행원이 대거 행차할 수 있는 전용객차 도입 명분으로 내탕금(內帑金) 100만 원을 받아냈습니다.

그는 이 중 40만 원을 사취하고, 또 전차 선로 수선비로 고종이 내준 70만 원의 일부도 횡령했습니다. 뒷날 경성전차가 일본 회사에 넘어가 콜브란이 고종에게 투자한 돈을 돌려주었으나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고종이 콜브란을 힐책하자 그가 옥새까지 찍힌 영수증을 내밀었습니다. 조사 결과 옥새를 도용한 이완용의 농간으로 드러났습니다. 

간상(奸狀)이 폭로되자 이완용은 보신책으로 갑오년(1894년) 이후 고종이 일제에 항거한 모든 사건과 외교문서 기록을 통감부에 넘겨주었습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한 친러파에서 한일합병을 주장한 친일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된 그는 아들의 자살이나 국모의 죽음보다 자신의 쾌락과 사욕 명철보신을 앞세웠습니다. 매천이 통분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우리는 남과 북에서 괴이한 죽음을 보고 듣고 있습니다. 이른바 ‘성완종 메모’로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총리까지 파문당하게 한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기관포로 사살당한 15명의 죽음입니다. 남쪽에선 국기가 흔들릴 정도로 파문이 컸고, 북쪽에선 아무런 동요도 없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항상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판의 정경유착에 대한 단죄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돈질로 ‘의리’와 ‘신뢰’를 갈구했던 성 전 회장은 아무런 구원도 받지 못한 채 고향 선영의 어머니 옆에 묻혔습니다. 국회의원 금배지와 함께. 그러나 기관포로 처형당한 북의 인사들은 주검은커녕 북망산천에 뿌릴 한 줌 재도 없다고 합니다.

죽음도 천차만별입니다. 왕조시대에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천자는 붕어(崩御), 제후나 왕은 훙서(薨逝), 대부는 졸거(卒去), 선비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망(死亡)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종교계 고위 성직자의 선종(善終) 열반(涅槃)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에 따라 와석종신이나 객사 병사 과로사 돌연사, 또는 익사 추락사 압사 폭사 질식사 정사 복상사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명이 다하거나 사고를 당해 맞이하는 죽음보다 의로운 죽음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개죽음 떼죽음 아닌 순국 순사 순직 분사 의사의 이름으로 목숨을 던진 사람을 존경하고 사숙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보다 죽음 앞에 더 평등합니다. 다만 고기 값을 했는지 여부에 따라 후세의 평가는 달라집니다. 

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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