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유목민 시대가 다가온다" VIDEO:Venice Floods Every Year
‘문명을 만드는 기술’로 불려온 건설은 사회의 존속과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핵심 역량과 기술은 어떠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현대건설에서는 각 분야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이를 진단해보는 칼럼을 기획 연재합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위협들
‘물의 도시’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니스는 매년 일정한 시기에 조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해수면이 상승하는 아쿠아 알타 현상이 발생해 자주 물에 잠기곤 합니다.
얼마 전 베니스의 운하가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났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바다에 말뚝을 박아 만든 ‘물의 도시’ 베니스는 본래 수위 변화에 취약했습니다. 가을부터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수위가 상승하고 ‘아쿠아 알타(높은 물)’를 대비해 관광객도 장화를 챙겨가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하가 검은 진흙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바싹 말라 곤돌라가 무력하게 멈춘 장면은 처음 목격합니다. 촘촘한 물길 네트워크에 의존하던 주요 교통이 마비되니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구급선마저도 운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기후 변화는 다양한 얼굴로 찾아옵니다. 단순히 평균 기온이 상승해서 폭염에 시달리고 빙하가 녹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 요세미티 국립공원 인근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이 그렇습니다. 여의도의 약 25배에 이르는 면적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불과 2년 전 발생한 산불의 상흔이 채 사라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당시 화재로 방출된 온실가스가 지난 18년간 감축한 분량의 2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40%가 해안 100km 인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성은 더욱 커집니다. 세계 10대 도시 중 8개 도시가 해수면 상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해발고도 1m에 불과한 몰디브는 가장 먼저 지도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해수면 상승을 막기 위한 다양한 논의는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방을 쌓거나 댐을 설치해 물과의 만남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물은 가두면 가둘수록 결국엔 넘치거나 어딘가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제 물과 함께 공존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내륙에 물이 머무를 공간을 마련하고, 우리가 해양을 새로운 터전으로 인식하고 적극 활용할 때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왜 책 표지에 배 사진을 넣었는가
건축학 필독서로 꼽히는 르 코르뷔지에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는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이 이룩한 진보를 바탕으로 당대의 건축이 닮아야 할 모범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표지에는 응당 이러한 내용을 대표하는 멋진 건축 사진을 넣을 법도 한데, 뜻밖에도 표지사진은 원양 정기선*의 복도입니다. 흡사 복도식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무미건조한 장면에 어떤 호소력이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이렇게 첨단의 기술과 자본이 집결한 제조 상품에서 건축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원양 정기선* 혹은 크루즈선은 공동주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거하고, 사교와 여가활동을 하며, 병원과 식당 같은 서비스 시설도 완비되어 있습니다. 적절한 크기의 방들은 검소하고 기능적인 삶을 반영하며, 복잡한 기계들은 물살을 가르는 3차원 곡면 안에 철저히 감춰집니다. 무엇보다 배는 건축처럼 특정한 땅에 구속되지 않고 탄생부터 쓰임을 다하는 날까지 자유롭게 이동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누구보다도 고정된 좌표에 귀속되지 않는 건축을 꿈꿨습니다.
*원양 정기선(遠洋定期船): 바다나 대양을 횡단하는 운송수단으로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는 배
1950∼1970년대 사람들은 기술적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사막, 극지방, 해저, 우주를 가리지 않고 정착지를 건설하겠다는 시나리오를 세웠습니다. 그 가운데 바다는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받아왔습니다. 해양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단게 겐조(Tange Kenzo) 도쿄만 계획(1960)이나 키요노리 키쿠타케(Kiyonori Kikutake)의 마린시티(1958-1963)를 들 수 있습니다. 당대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희망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세계 건축 흐름을 선도하고자 했습니다.
*메타볼리즘(metabolism): 1960년대 전후 일본 특유의 건축 사조로, 물질대사라는 뜻처럼 건물을 하나의 유기생물로 보는 건축 운동
미국의 건축가 벅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트리톤(Triton) 시티 또한 당시 도쿄만에 거대한 수상 주거를 계획해달라는 일본의 의뢰로 탄생한 프로젝트입니다.
풀러는 중력에 가장 원초적으로 대응하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최대 1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자급자족형 도시를 꿈꿨습니다. 태양열‧풍력‧파력 등 재생 에너지원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폐기물 관리 및 재활용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도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욱 공평하고 협력적인 방식으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유토피아의 뜻처럼 트리톤 시티도 존재하지 않는 선구적인 사고로만 남아 있습니다.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선구자들의 구상을 담은 해상 공동체의 결정체는 2030년쯤 등장할 예정입니다.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발표한 5천억 달러 규모의 네옴 프로젝트는 해상도시 ‘옥사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총 면적 48㎢, 지름 7km에 이르는 팔각형 형태의 산업도시 옥사곤은 바다 위에 떠있는 부유식으로 뉴욕 33배 크기에 9만 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옥사곤은 풍부한 태양열과 풍력 에너지로 구동되고, 인공 지능과 첨단 제조에 중점을 둔 기술혁신의 허브를 목표로 추진 중에 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미래도시에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에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2022 세계도시정상회의(WCS, World Cities Summit)’에 참가해 <스마트시티 참조모델> 전시물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개된 모델은 ‘인간 중심 도시, 자연과 공존하는 도시, 지속가능한 도시’라는 방향성에 따라 녹지와 수변공간의 접근성이 향상되고, 보행자에게 친화적인 지상공간이 제시되어 이목을 끌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스마트시티에 필요한 인프라 선행 연구 등을 지속하고 있으며, 미래 도시의 청사진을 구체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물과 공존하는 방식
국토의 1/3 이상을 간척사업으로 만든 네덜란드는 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네덜란드의 많은 국토가 제방을 쌓고 풍차를 이용해 바닷물을 퍼낸 뒤, 땅의 소금기가 빠져 경작이 가능한 토양이 될 때까지 기다린 인내의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지평선과 함께 자동차를 달리다 보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해발고도가 마이너스 숫자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바다 밑을 질주한다는 기이함은 앞으로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감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덜란드는 보트 하우스가 3천 채에 달할 정도로 물 위에서의 삶이 당연합니다. 물과 맞닿아 있어서 거실에서 바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주택도 흔하고, 속이 빈 콘크리트 박스의 부력을 이용해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하우스 보트 주거 단지도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파도 높이에 따라 상하 이동이 가능할 뿐, 육지의 주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물의 단열 성능 덕에 해저 공간은 냉난방 설비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더욱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4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해저공간이 문을 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의 삶에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자전거 관련 시설인데요, 그간 관광 목적의 해저시설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을 해저에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중앙역에 위치한 스테이션플레인(Stationsplein)과 에이블레바드(IJboulevard)가 그 주인공으로 각각 자전거 7천대와 4천대 보관이 가능합니다. 새로운 시설 덕분에 암스테르담의 주요 기차역 주변은 더 넓고 깔끔한 환경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수중 자전거 차고는 도시의 지속적인 자전거 도난 문제를 완화할 뿐 아니라 도시의 증가하는 자전거 이용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주차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환영받고 있습니다.
점점 가시화 되는 해저도시들
해저도시를 건설한다는 아이디어는 수 세기 동안 존재해 왔지만,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입니다. 해저도시의 개념은 수중에서 인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독립된 환경을 조성한다는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1969년, 미국 정부는 수중생활이 인간의 생리와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인 텍타이트(Tektite) 프로그램을 실시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세인트 존 해안 13m 깊이 과학실험실을 건설하고, 네 명의 과학자가 무려 58일 동안 체류하며 인체에 나타나는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국내에서도 해저도시 건설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주관하며 한국해양대학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현대건설 등 22개 기관과 기업이 참여한 이 해저과학기지 건설계획은 목적과 규모 면에서 앞서 언급한 텍타이트 계획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학기지가 세워지는 곳은 울산 신리항에서 900m 떨어진 곳으로부터 해저 30m 지점으로 탁도, 조위, 수온 등 수중 작업이 용이한 환경이며, 최근 20년간 지반 침하가 없어 안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초반에는 3인이 30일간 체류할 수 있는 공간을 시험하고, 2027년까지 실제 체류할 수 있는 모듈형 수중 구조물로 확장하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울산 해저도시가 여타의 계획들과 갖는 차별점은 바다 밑 수중건설작업을 로봇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현대건설과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육상에서 제작한 구조물 모듈을 해저로 가져가 조립하는 기술에 활용할 수중건설로봇을 함께 개발하고 있으며, 이런 노력은 추후 우주도시 건설까지도 기대하게 합니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
네덜란드 로테르담시는 해수면이 상승할 2035년을 예상해 물의 도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제방을 높이는 방식을 고수하지 않습니다. 물을 그들이 살아야 할 새로운 땅으로 받아들이고, 물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이 제시됐습니다. [ ▶ 로테르담 워터시티 2035 프로젝트 홈페이지: https://marcovermeulen.eu/en/projects/rotterdam+water+city+2035) ]
한층 확장된 강 수면은 새로운 수상 주거들의 주소지가 되고, 이를 둘러싼 제방은 산책로 역할을 합니다. 공동주택의 중정은 물을 담는 저장고 역할을 하고, 하수처리장과 같은 인프라가 어린이 놀이터처럼 일상에 편입됩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삶이 청사진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바다를 메워 국토를 ‘생산’해야만 했던 오랜 굴레에서 해방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류는 인구증가와 기후변화에 맞서 바다를 활용한 다양한 생존방식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해상풍력, 해양 열에너지 변환(OTEC: 따뜻한 지표수와 차가운 심해수 사이의 온도 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과 같은 에너지 생산방식에서부터, 해수를 증발시켜 담수를 얻는 방식, 이산화탄소 흡수가 뛰어난 해조류 양식 같은 식량 문제 해결까지 다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결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해저 2만리> <워터월드>처럼 SF작품에서나 만나던 바다는 어느 새 우리의 또 다른 생활터전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배윤경 /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flickr, 현대자동차,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건축가 배윤경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건축 설계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오기사디자인 소속으로 여러 미디어에 건축 관련 글을 쓰고 강의도 합니다. 저서로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DDP 환유의 풍경>, 아모레퍼시픽의 <New Beauty Space>, 현대카드의 <The Way We Build>가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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