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80년대 서울의 건설 현장 이야기 담은 '서울은 지금 공사중' 발간
서울역사편찬원, 개발 시대 서울의 건설 현장 이야기를 담아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구술자료집 제15권 <서울은 지금 공사중> 발간
1960~1980년대 서울의 도로·교량·상하수도·공원·지하철 등
건설 사업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의 모습을 구술로 담아내
<서울은 지금 공사중>은 시민청 ‘서울책방’에서 구입 가능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은 1960~1980년대 서울의 각종 건설 사업 현장의 실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의 활약상을 구술로 풀어낸 서울역사구술자료집 제15권 <서울은 지금 공사중>을 발간하였다.
서울역사편찬원은 2009년부터 서울시민들에게 현대 서울의 생생한 역사를 전달하기 위한 구술채록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모두 14권의 서울역사구술자료집 총서를 발간하였다.
1966년엔 압구정동 땅 한 평이 ‘짜장면 10그릇 값’
(편집자주)
이번에 발간한 제15권 <서울은 지금 공사중>은 1960~1980년대 경제성장기 서울의 교량, 도로, 상하수도, 지하철 등 각종 건설사업에서 활약했던 공무원들의 구술을 채록·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서울은 1960~1980년대 큰 변화를 겪었다. 인구는 1960년 244만 명에서 1980년 836만 명으로 매년 30만 명씩 증가하였다. 이시기 한국 경제도 매년 10% 가까이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서울은 말 그대로 ‘건설도시’였다.
당시의 서울은 도시 근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판자촌으로 대변되던 청계천이 복개되었고, 그 위로는 고가도로가 지났다. 논밭과 과수원이었던 강남은 영동지구와 잠실지구로 개발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한강을 따라서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만들어졌고, 그 사이에는 많은 다리들이 건설되었다. 땅속으로는 지하철이 달리고, 상하수도 보급과 하수처리장 건설도 함께 이뤄졌다. 정부가 내세웠던 ‘조국 근대화’는 이렇게 완성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혹은 기업인을 뽑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 차원이 아닌 시민들의 일상이라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출퇴근과 등하교를 위해 다녔던 도로, 한강을 건넜던 교량, 시민의 발이 된 지하철, 매일 마시는 수돗물, 시민들이 배출하는 생활하수를 처리해주는 하수처리장 등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시민들과 함께했던 것들에 눈을 돌려보면 공무원들의 활약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에는 모두 5명의 구술자가 등장한다. ▴박만석(前서울시 하수국장) ▴손의창(前서울시 청계천 복개공사 보조감독) ▴최주하(前도시개발공사 개발이사) ▴김영수(前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이보규(前한강관리 사업소장)이다. 이들은 1960~1980년대 서울시의 교량·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의 건설 현장을 지휘·감독하였던 공무원들이다. 서울 시민들이 경험했던 하루하루의 일상을 바꾼 현장의 주역들이라고 하겠다.
첫 번째 이야기는 박만석 전 하수국장의 회고이다. 그는 1933년생으로 치수과장과 구획정리과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66년 청계천하수처리장 건설에 필요한 해외 차관을 얻는 작업을 담당했으며 1968년에는 송파대로 건설 사업을 맡았다. 당시는 1·21사태 직후였기 때문에 서울 개발 사업에는 군사적 목적이 반영되었다.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북악스카이웨이 도로가 대표적인 예다. 그가 맡은 송파대로도 유사시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단거리의 직선도로로 만들어졌다. 또한 그는 1966년 〈서울시 하수도백서〉를 만드는 일도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서울시에는 하수도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가 없었는데, 구술자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내무부에서 만든 보고서와 흩어져 있는 책자들을 수집해 백서를 편찬하였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서울시 하수도 업무는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손의창 전 서울시 청계천 복개공사 보조감독의 기억이다. 그는 1934년생으로 1950년대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고위공직자가 아닌 현장의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당시 청계천 복개공사의 일상을 보다 자세하고 세밀하게 말해준다. 당시에는 중장비들이 많지 않았다. 트럭에서 내린 자재는 지게차가 아닌 인부들이 현장으로 날랐다. 레미콘도 없어서 인력으로 시멘트를 붓고 지게로 지어 날랐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당시 복개공사에 참여했던 건설회사들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이 된 현대건설이 초창기에 공사에 참여했던 과정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억도 구술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최주하 전 도시개발공사 개발이사의 회고이다. 그는 1935년생으로 서울시 치수계장을 비롯해 서울대공원 공사과장과 한강관리사업소장 등을 지냈다. 1962년 치수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던 그가 처음 맡았던 업무는 땅속 상수도관의 누수를 탐지하는 검침 인력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노후된 관들이 많아서 누수율이 높아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1960년대 후반 국산 수도관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기억한다. 또한 강남개발 당시를 회고하면서 개발로 인해 땅값이 수십 배가 올랐고 논밭과 과수원을 가졌던 원주민들이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었다고 술회하였다. 개발 당시 그는 강남대로와 영동대로 등 주요 간선도로 건설을 담당하였는데, 도로 건설에 들어가는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굴곡진 구간을 평평하게 만들지 못하고 일정 부분 경사로를 남겨 놓았다고 회고하였다.
1966년엔 압구정동 땅 한 평이 ‘짜장면 10그릇 값’
1970년대 초 강남의 모습. 강북의 대표적인 고급 주택가인 신당동은 3.3㎡(평)당 가격이 3만원이었던데 비해 당시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400원에 불과했다.(좌) / 강남 개발초기인 40년 전만 해도 강남은 주거지로 인기가 없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고 노력했을 정도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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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이야기는 김영수 전 도시계획국장의 기억이다. 그는 1939년생으로 지하철본부 공사계장과 건설국 교량계장과 도로과장 등을 지냈다. 그는 강변도로 건설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김현옥 시장이 준공표지판 휘호를 한글로 ‘강변일로’로 썼던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하철 건설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11호선까지 있던 도쿄와 비교하면 겨우 10km에 불과했지만 모두들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고 회고하였다. 이외에 2호선 이대역 에스컬레이터가 깊이 나 있는 이유, 5호선이 강동역에서 두 갈래로 나눠진 이유, 6호선 응암역 구간이 원형의 순환선이 된 이유 등 지하철 건설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보규 전 한강관리사업소장의 회고이다. 그는 1942년생으로 서울시 예산과를 거쳐 새마을지도계장과 송파구 총무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당시 서울시 예산 관련 업무의 흐름에 대해 회고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시장이나 구청장 등 기관장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바로 쓸 수 있는 가용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예산 업무의 핵심이었다. 또한 서울시는 각종 개발 사업을 하면서 많은 재원이 필요하였다. 물론 세수법정주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무조건 세수를 늘릴 수는 없었고, 이에 세외수입 확보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구술자는 강남개발과 같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나오는 체비지 수입을 당시의 대표적인 세외수입으로 뽑았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을 통해 당시의 서울시 건설 현장에서 활약했던 공무원들의 노고와 애환을 생생히 엿보는 기회를 가지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서울역사구술자료집은 제15권 〈서울은 지금 공사중〉은 서울 주요 공공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서울시청 지하 1층의 시민청에 있는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다. 또한 서울역사편찬원 누리집(https://history.seoul.go.kr)에서 제공하는 전자책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
서울시 서울역사편찬원
1970년대 서울의 강남(Gangnam, Seoul in the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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