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긴 얼굴’을 떠올리며 [추천시글]

 

 

스승의 ‘긴 얼굴’을 떠올리며

2021.08.04

 

며칠 전, 스승 나제만(Theodor Nasemann, 1923~2020) 교수께서 97세 나이에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제자가 중심이 되어 ‘추모집’ 발간을 준비 중이라며 필자도 스승을 기억하고 기리는 추모사를 써달라는 부탁도 있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왜 돌아가신 지 십여 개월 지나서야 필자가 스승의 부고를 받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승이 사시는 시골 마을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에서 개업의로 있던 후배 동료에게, 스승께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알려 달라고 부탁해두었기 때문에 더욱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후배 동료가 스승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것입니다. “거 참”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스승은 학문적으로는 물론, 제자의 삶을 늘 세세히 챙겨주시던 인자하기 그지없는 분이셨습니다. 지난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제자는 내 마음의 거울’이란 글에서 스승을 흠모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칼럼, 2021.5.3.).

 

 

여러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1973년 어느 날 오후 주임교수 사무실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하고 조금은 긴장하며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뜻밖에도 두 다른 동료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모두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자기네들도 ‘모르겠다’라는 눈신호를 보냅니다.

 

스승님은 “자네들도 알겠지만, 우리 피부과학교실(敎室, Department)에 상의(上醫, Oberarzt, Chief Physician)자리가 공석이네”. “오늘은 그 점을 가지고 자네들과 상의하고자 자리를 마련하였지”라며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여러모로 살펴보았네, 환자 진료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기 앉아 있는 세 명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임상가임을 환자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말하고 있네. 그리고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임상 실습에 나온 의대생을 돌보는 열의라든지, 선배의사로서 후배 동료를 돌봐주는 자세에서 여기 세사람 간에는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네. 나의 복이기도 하지.“

 

이어지는 말씀이 필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연구업적이란 측면에서는 보면, Dr. Lee가 지난 몇 년간 이룩한 결과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네, 그러면서 그 Oberarzt의 임무를 Dr. Lee에게 맡기려 하는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시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필자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두 동료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필자에게 손을 내밀며 축하하여 주었습니다.

 

 

조금 후, 비서가 샴페인Champagne) 병과 멋있는 크리스털 잔을 가지고 들어와 축하의 순간을 더욱 기억에 남도록 하였습니다. 스승의 그 투명한 인사방식은 훗날 필자가 근무한 대학이라는 조직에서, 각종 사회조직 활동에서 큰 지침으로 늘 마음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필자는 스승의 보살핌으로 어려울 수도 있었던 ‘고비’를 늘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벅찬 마음으로 옛 생각에 잠기는데, 필자 때문에 비롯된 스승의 ‘긴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설명: 독일에서 ‘긴 얼굴(Lange Gesichter)'이라 하면, 당혹해하거나 크게 실망하였을 때의 표정을 말함]

 

독일 Wolfgang von Goethe 대학교에서 나제만 교수의 가르침 아래 전문의 과정을 끝내고 교수자격(Habilitation)까지 마쳤습니다. 뜻밖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빙을 받고 1975년 5월부터 연세대학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1975년 2월, 필자는 나제만 교수에게 귀국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께서는 “이제 교수 자격을 땄으니 특진환자를 볼 수 있고 그러면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가 생길 테니 연구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텐데…”라며 귀국을 만류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여기까지 이끌어주셔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뜻을 어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태껏 독일에서 살면서 이곳에 영주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주임 교수로 갑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스승께서는 몹시 섭섭해하면서도 필자를 붙잡을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이해해주시며, 축하하여 주셨습니다.

 

 

귀국할 준비를 마치고 그동안 머물렀던 피부과학교실에서 송별연을 마련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어느 부서에 누군가 신규로 부임하면 있던 사람들이 환영식을 마련합니다. 하지만 송별식은 직장을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기억한다는 뜻의 파티를 마련하는 것이 관행입니다.

 

그래서 동료 교수 및 레지던트, 간호사 등 여러 부서의 종사자 약 70~80명을 초청하였습니다. 필자의 여보(如寶)가 집에서 독일 사람이 좋아하는 잡채와 전, 술안주로 빈대떡을 만들고 중국식당에서 몇 가지 요리도 배달받고 맥주를 준비하였습니다.

 

필자가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되어, 앞으로 나가 인사말을 했습니다. “조만간 여러분 곁을 떠나 귀국길에 오릅니다. 아마 이 자리가 여러분과의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자리임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독일에서 생활했고, 독일을 떠나니 어찌 소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저는 독일에 와서 의학을 공부한 것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순간 참석자들의 표정이 굳어졌고 특히 스승 나제만 교수의 얼굴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얼굴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기분이 나쁘거나 언짢을 때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필자는 웃으며 “제가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것을 특별히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의학 공부는 이론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독일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던 것은 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독일에서 숨 쉬고 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독일이란 공간에서 살면서 서양 문화를 알게 되었고 동서양의 문화를 아우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기회를 준 독일 사회에 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필자가 인사말을 마치자 모두 얼굴이 펴지고 휴~하는 안도의 한숨도 들려오는 듯싶었습니다. 스승께서 필자에게 다가와 따듯하게 껴안으며 “정말 감동적이다. 자네 인사말이 우릴 크게 행복하게 만들었다네.”라고 하며 필자의 등을 두드리며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승께서 축배의 맥주잔을 올리시며, 참석자를 대표해서 축하의 따듯한 마음을 크게 표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이국풍 음식을 즐기는 참석자와 함께 작은 ‘향연’이 진행되었습니다.

 

바로 그 스승 나제만 교수께서 지난해 향년 97세로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후학들이 마음을 모아 스승을 기리며 추모집(輯)을 영전에 바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필자는 그런 훌륭한 스승을 모실 수 있었던 큰 복을 누렸다는 사실을 거듭 마음에 새기며 행복해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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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전 한국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전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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