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리가 버릴 것들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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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우리가 버릴 것들

2020.01.07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 듯이 붙들었다 해가 지면 내어쫓고, 초상난 데 노래하고, 불붙은 데 부채질, 길 가운데 허방 놓고, 외상 술값 억지 쓰기, 전동(顫動)다리 딴죽치고, 소경 의복에 똥칠하기, 배앓이 난 놈 살구 주고, 잠든 놈에 뜸질하기, 곱사등이 잦혀놓기, 맺은 호박 덩굴 끊고, 패는 곡식 모가지 뽑기, 좋은 망건편자 끊고, 여승 보면 겁탈하기, 애 밴 계집의 배통 차고, 우는 아이 똥 먹이기, 의원 보면 침 도둑질, 물 인 계집 입 맞추고, 옹기 짐의 작대기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약한 노인 엎드러뜨리고, 소리할 때 잔말하기…”

우리나라 대표 판소리 ‘흥보전(興甫傳)’의 한 부분입니다. 놀부의 걸쭉한 심술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웃습니다. 판소리는 노랫가락을 듣는 즐거움도 크지만 중간중간에 자유로운 리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아니리(사설·辭說)가 백미인 듯싶습니다.

저 ‘어마무시한’(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심술을 노래하기 전 명창은 고수의 장단에 맞춰 재미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놀부의 신체 상황을 설명합니다. “본디 사람은 오장육부로되 놀부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사부(心思腑)가 하나 더 왼편 갈비 밑에 병부 주머니를 찬 듯 떡하니 붙어 있으렷다. 허이!”

‘놀부=심술’, 이것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놀부는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이지만 사람 이름 이외에 일반명사로도 쓰입니다. 바로 ‘심술궂고 욕심 많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심술이 궁금해집니다.

심술은 한자 ‘心術’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의 기술’입니다. 그러니 심술은 잘 쓰면 대인이 될 수도, 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심술이 나쁘거나 잘못 쓴다면 소인이 되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심술은 처음부터 나쁜 의미의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좀 살아보니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심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이 아무리 잘생기고 예뻐도 심술이 나쁜 사람은 상대하기 싫습니다. 반대로 비록 외모가 볼품없더라도 심술이 좋다면 더없이 큰사람으로 보여 가까이하고 싶고 존경하게 됩니다.

‘심술’은 표준국어사전에 ‘온당하지 아니하게 고집을 부리는 마음’, ‘남을 골리기 좋아하거나 남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보’로 나와 있습니다. 심술이 아예 나쁜 뜻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마음의 기술이 남을 골리거나 힘들게 하는 것이라니 씁쓸함이 앞섭니다.

심술은 동사 ‘피우다’, ‘떨다’, ‘내다’ 등과 어울립니다. 그런데 나는 ‘부리다’와 연결될 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부리다’에는 행동이나 성질 따위를 참지 못해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심술궂은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괴롭힌다기보다는 그 자신도 모르게 못된 심보를 부리곤 하더라고요. 하나같이 자신이 남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한 줄도 모른답니다.

혹시 주변에 심술쟁이가 있나요? 그렇다면 얄밉더라도 절대 비판하진 마세요. 오히려 그에 대해 좋게 말해 보세요. 누군가에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음부터는 심술부리지 않고 부드럽게 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지난해 말 심술궂은 이와 좀 세게 부딪친 후, 심술은 피하는 게 가장 좋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심술 말고도 참지 못해 부리는 것은 많습니다. 주사(酒邪)를 부리고, 욕심을 부리고, 난동을 부리고, 성질도 부립니다. 이 중에서 성질은 심술과 쓰임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질(性質) 역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이 지닌 ‘마음의 본바탕’으로, 본래는 나쁜 의미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본바탕이 나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그 사람, 참 성질 있네”라고 하면 그리 좋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사납다’ ‘급하다’ ‘못되다’ ‘고약하다’처럼 부정적인 말들과 함께 쓰인 탓이 크겠지요. 언어도 사귐이 중요합니다. 동사에 따라 명사의 이미지가 바뀌니 말입니다.

새해를 맞아 크고 작은 결심들을 하셨지요. ‘버리는 계획’을 세운 이들도 많을 듯합니다. 술을 버리겠다, 담배를 버리겠다, 다이어트로 살을 버리겠다…. 그러고 보니 버릴 것도 참 다양합니다. 나는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둔 미움과 질투, 시기를 버리겠습니다. 겉멋과 잔꾀도 버리겠습니다. 며칠 못 가서 삐끗한다 해도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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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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