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패율제를 다시 생각하며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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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패율제를 다시 생각하며

2020.01.06

나는 2012년 4월 11일 실시된 19대 총선에서 애석하게 낙선한 두 명의 후보를 생각하며 자유칼럼에서 ‘석패율제를 살리자’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다 돼 21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선거법 협상을 벌이며 석패율제를 다시 도마에 올렸으나 그때처럼 정파적 이해타산 끝에 다시 무산됐습니다.

내가 애석하게 여겼던 두 후보는 광주 서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이정현 후보와 대구 수성 갑구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김부겸 후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소속된 정당은 5공 정권 이후 광주 전남, 대구 경북 지역에선 당시까지 단 한 사람의 자당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한 적지(敵地)였습니다.

두 정당의 후보가 출마를 한 경우에도 득표율은 10%를 넘기 어려웠고, 소수점 이하의 득표율도 많았습니다. 그 지역에서 입후보하는 것 자체가 바보짓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후보를 내지 못한 지역구도 여럿 있었습니다.

19대 총선에서 ‘두 바보’는 예상 밖으로 선전해 김부겸 후보가 40.4%, 이정현 후보가 39.7%의 득표율로 당선의 문턱까지 갔다가 낙선했습니다. 석패율제가 있었다면 두 사람은 그때 국회에 진출해, 두 지역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교두보로서 나름의 기여가 되지 않았을까 여겼습니다.

두 사람의 도전은 20대 총선에서 마침내 꽃을 피웠습니다. 새누리당의 이 후보가 광주나 마찬가지로 보수정당의 불모지였던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김 후보는 같은 대구 수성구에서 각각 출마해 당선했습니다.

그같은 선거 결과를 보면서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갖고 괜스레 석패율제도를 말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두 지역에서 제2, 제3의 이정현 김부겸이 나와 지역감정이 치유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4년도 못 가 물거품이 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와중에서 이정현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가 21대 총선에선 고향 지역구를 떠나 수도권에서 출마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김부겸 의원은 대구의 지역구를 지킬 예정이지만 박근혜 탄핵의 여파로 민주당에 대한 지역의 악화한 민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분위기라고 합니다. 지역감정의 고질이 더 악성화한 형태로 재발할 상황입니다.

특정 정당이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지역에서 후보자를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로 동시에 올려 지역구에서 낙선하면 비례후보로 당선시키는 게 석패율 제도입니다. 한 명의 국회의원이라도 국회로 보내 지역의 민심을 대변케 하자는 취지입니다.

사실 석패율제도는 광주 전남, 대구 경북같이 수십 년간 특정 정당이 한 사람의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극단적인 일당독주 지역이 없다면 도입의 필요성이 없는 제도입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말마따나 중진(重鎭) 구제용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법 개정 협상에서 이 제도의 도입이 무산된 과정을 보면 2012년 협상 때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엔 원내 제1, 제2 당인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이 도입키로 했다가 민주통합당이 군소 정당인 통합진보당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석패율제를 버렸습니다.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군소 진보 정당들은 이 제도가 거대 정당들에 유리한 제도라며 거대 정당이 낙선한 중진의원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당에 폐기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넘게 국회의원을 한 사람도 내지 못한 지역에 중진이 남아 있기라도 하다는 겁니까? 남아 있다면 그 한 사람이라도 지역을 대변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겁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군소 정당들이 석패율제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개정 선거법의 비례당선제를 잘 활용하면 한 석의 의석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러자 여당인 민주당이 7년 전 군소 정당들이 주장했던 중진 구제용을 이유로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민주당이 석패율제 도입에 반대한 진짜 속내는 군소 정당들이 석패율 당선을 위해 전력투구하게 되면 수도권의 접전 지역구에서 자당 후보가 불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7년 사이에 민주당과 군소 정당들의 주장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나, 있어 보이지도 않는 중진을 핑계로 석패율제를 무산시킨 4+1 체제의 선거법 협상은 ‘꼼수’ 정치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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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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