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지리산과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노래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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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지리산과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노래

2019.11.20

이달 초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올봄 처음으로 이 명산에서 받았던 감흥이 깊어 산의 가을철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지요. 지리산은 큰 산입니다. 서쪽 편 삼도봉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가 만나는 지점인데 이를 기준으로 하여 봄에는 경상남도 지리산을 보았고 이번에는 전라도 지리산을 보았습니다. 넓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은 지리산에서 두 번째 높은 반야봉에서 최고봉 천왕봉 간의 거리가 직선거리로는 16km 남짓, 능선의 경로로는 20km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

산행을 시작한 피아골과 하산 길 뱀사골 두 계곡의 가을 풍경은 5월의 신록과 또 다른 감흥을 주었습니다. 산행 경로는 피아골(전남 구례)-피아골 삼거리-노고단 대피소-피아골 삼거리-반야봉-화개재-뱀사골(전북 남원) 입니다. 전라도 지역의 지리산 여러 명소들을 경유했습니다. 1박했던 대피소 화장실에 수세식 변기가 있는 것을 보자 봄에 머물렀던 세석대피소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신기해하며 깔깔거리던 단체 중학생 등반객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종주 경로의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오르는 길이 가팔라 중간 갈림길에 무거운 배낭을 벗어놓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섰지만 1km 남짓한 거리를 힘들게 올랐습니다. 좋아하는 구상나무가 많았는데 강한 나무 향이 힘든 것을 덜어주었습니다. 반야봉 주변에 구상나무 숲이 꽤 무성해 보였는데 최근 고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되어 안타깝습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와 여러 겹으로 흩어진 봉우리들은 마치 멋진 수묵화와 같았습니다. 하산 길에 본 뱀사골 계곡은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는 멋진 풍경으로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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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을 털고 홀로 심산유곡에 들어가니 묻어 두었던 그리움, 오래된 기억 같은 순수한 감정으로 떠가려는 마음을 친구들의 병환 소식이 닻처럼 붙잡았습니다. 평소 무종교파이나 이번 산행에서는 돌로 쌓은 탑을 지날 때 돌을 얹으며 지인들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험로에 숨이 차지 않을 때는 여러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을 앞두고 록밴드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노래들을 계속 들었나 봅니다. 평소에도 세상사가 보기 싫거나, 접하는 대중문화가 식상할 때 자주 찾는 음악입니다.

이 밴드는 1960년대에 히피문화 발상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리더인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 1942년생)가 약물중독 치료 요양소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한 1995년까지 꾸준히 활동했던 전설적 음악가들입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밥 딜런(Bob Dylan)과 더불어, 특히 지금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무척 익숙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록밴드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요즘 국내에서 흔한 칼군무를 추는 아이돌 그룹과 모든 면에서 정 반대라고 보면 맞을 듯합니다. 깔끔한 미모의 어린 남녀의 빠른 박자와 신기한 춤 대신, 허름한 의상과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와 수염, 넉넉한 풍채의 가르시아와, 음악에 빠져 연주에 열심인 다른 구성원들이 장비로 가득한 무대를 채웠습니다. 상업적인 흥행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현재 유튜브에 무수한 공연 실황과 음원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70년에 발표된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앨범에 수록된 ‘잔물결(Ripple)’ 외 여러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중 ‘내 생의 다락방(Attics of my life)’을 소개합니다. 시감(詩感)이 빈약한 사람의 해석이니 참고하십시오.

In the attics of my life/ Full of cloudy dreams unreal/ Full of tastes no tongue can know/ And lights no eye can see/ When there was no ear to hear/ You sang to me.

I have spent my life/ Seeking all that's still unsung/ Bent my ear to hear the tune/ And closed my eyes to see/ When there were no strings to play/ You played to me.

In the book of love's own dream/ Where all the print is blood/ Where all the pages are my days/ And all my lights grow old/ When I had no wings to fly/ You flew to me/ You flew to me.

In the secret space of dreams/ Where I dreaming lay amazed/ When the secrets all are told/ And the petals all unfold/ When there was no dream of mine/ You dreamed of me.

내 인생의 다락방은/ 이 세상 같지 않은 구름 같은 꿈과/ 혀로는 알 수 없는 맛과/ 눈으로 볼 수 없는 빛들로 가득하네/ 들어줄 귀가 없었을 때/ 당신은 내게 노래를 했지.

난 내 생에서/ 새로운 노래를 찾으려 애썼고/ 그 곡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네/ 그리고 보기 위해 눈을 감았네/ 연주할 줄[絃]이 없을 때/ 당신은 내게 연주해 주었지.

사랑의 꿈을 담은 책에는/ 글자들이 모두 피로 쓰였고/ 쪽들은 나의 날들이네/ 나의 빛들이 바래져가네/ 내가 날개가 없었을 때/ 당신이 내게로 날아왔지/ 당신이 내게로 날아왔지.

꿈들의 은밀한 곳에서/ 나는 놀라운 꿈을 꾸고 있네/ 모든 비밀이 드러날 때/ 모든
꽃잎들이 열릴 때/ 나의 꿈이 고갈되었을 때/ 당신은 나를 꿈꾸었지.

혹자는 이들의 음악이 좀 몽환적인 점을 들어 마약 사용과 환각의 산물이라고 단선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슈만의 음악이나 반 고흐의 그림이 그들의 정신질환의 결과가 아니듯 이들의 노래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 중고등 학교나 대학의 문학 수업에서 이 밴드의 노래들이 과제로 쓰이고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봄에 지리산을 처음 오르고 반한 것은 행운입니다. 높고 넓으며, 철따라 신록과 진홍으로 단장하며 넉넉히 내어주는 산이 고맙습니다. 내 생의 다락방에 새로운 그림이 걸리고, 소장한 이미지들에 아름다운 색을 추가한 듯합니다. 급히 병가를 낸 친구 대신 맡은 강의들로 지금은 정신없이 지내고 있지만, 초가을에 찾았던 설악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다시 볼 날이 기다려집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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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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