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늘 바람이 분다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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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늘 바람이 분다

2019.09.27

“얼굴에 마주치는 바람이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한강 둔치를 걷다 문득 떠오른 말입니다(솔직히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코스모스들이 일제히 춤을 춥니다. 키 큰 꽃들 사이 작고 몹시 가녀린 것들은 아예 눕습니다. 꺾이지 않으려 몸에 힘들을 뺀 것이지요.

코스모스의 꽃말이 순정, 소녀, 순결이던가요. 신이 가장 먼저 만든 습작(習作)이라 가냘프고 여리다고 했던가요. 지금 이 순간 나는 코스모스에게 ‘지혜’라는 꽃말을 주고 싶습니다. 코스모스는 가으내 바람에 누웠다 일어서길 수천만 번 반복하면서 안으로는 씨앗을 점점 단단하게 품을 것입니다. 내년 가을 또다시 화려하게 꽃피울 야무진 꿈을 꾸며.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바람에 순응하는 풀의 생명력을 노래했습니다. 3연 18행으로 이뤄진 시 ‘풀’의 마지막 3연입니다.

시인 정호승 또한 ‘상처’ 2연에서 “길을 가다가 풀잎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상처의 깊이를 쓰다듬어본 적이 있는가//풀잎들이 바람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라고 읊었습니다. 시인의 질문에 답 대신 ‘쓰러졌다 손을 흔들어준’ 풀잎의 몸짓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사람도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답니다. 축제의 바람, 치유의 바람, 사랑의 바람…. 먼저 입술을 작게 오므린 후 혀를 동그랗게 말아 입김을 불어보세요.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올 겁니다. 바로 휘파람입니다. 삶의 고비를 넘겼을 때, 혹은 계획했던 일을 해냈을 때 ‘참 잘했다’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가벼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어보세요. 편안함과 즐거움이 만나 휘파람은 예술이 될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 내는 휘파람 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휘파람이 바람 맞냐고요? 물론입니다. 휘파람은 ‘휘+ㅎ+바람’으로 이뤄진 합성어입니다. ‘휘’는 ‘돌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휘감다, 휘젓다, 휘돌다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뭔가 ‘동그랗게’ 도는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진짜로 입안에서 바람이 돌아나가는지, 지금 한번 휘파람을 불어보세요. 당신의 매혹적인 휘파람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1970~80년대 대한민국 엄마들의 필수품 ‘빨간약(머큐로크롬)’은 늘 ‘바람’과 함께했지요. 딸이든 아들이든 다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들어오면 엄마는 빨간약부터 집어들곤 “호~호~” “후~후~” 불어가며 발라줬지요. 상처가 덧나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온전히 담긴 ‘치유의 바람’입니다. 엄마의 입김이 닿으면 흘러내리던 빨간 액체가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 금세 통증이 줄어들고 딱지가 앉았던 경험, 다들 있지요? 아리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그날의 그 느낌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 하고 부는 바람도 있습니다. 따뜻한 바람인 입김입니다. 어릴 적 강원 산골의 겨울은 뼛속까지 시리게 추웠습니다. 방 안에 있어도 외풍이 어찌나 셌던지 자리끼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지요. 아침이면 찬 공기가 몹시도 싫어 이불 속에서 버티다 엄마한테 엉덩이를 한 대 맞고서야 마당에 나가 세수를 했습니다. 부리나케 고양이 세수만 하고 방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 하고 달라붙었지요. 그러면 오빠 언니 동생이 다 같이 입을 모아 언 손에 “하~~” 하고 입김을 불어줬어요. 돌아가면서 네 번(2남3녀)을 하고 나면 방 한가운데 아침밥상이 차려졌답니다. 그날의 그 ‘바람’이 몹시 그리워 두 손을 오므리고 “하~” 하고 불어봅니다. 어찌나 따뜻한지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코스모스와 풀처럼 사람들도 바람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아름답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나이가 많든 적든, 여자든 남자든 사람의 삶에는 늘 바람이 불지요. 때론 급작스럽게 광풍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잠시 주저앉았다,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다시 세상을 살아내지요. 만약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눕는 이가 있다면 따뜻한 바람을 불어 주세요. 휘파람을 불어 응원하는 것도 좋겠군요. 그 누군가가 “바람이 스승”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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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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