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대한 부채감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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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부채감

2019.09.25

지난 9월 9일 자유칼럼에 실린 황경춘 선생님의 글 『서울의 한 동네서만 60년』을 읽었습니다. 서울의 서북쪽 끝인 은평구에서 비슷한 세월 같이 살아오신 분이 계시니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동네에서 딱 한 번 이사하신 곳이 녹번동이라고 하셔서 마음속 작은 향수도 일었습니다.

은평구의 동네마다 있는 골목길들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녹번동의 길을 다닌 기억은 고등학교 때의 한 번밖에 없습니다. 구청과 문화예술회관, 그리고 유명한 감자탕집은 다녔지만 골목길 걷기와는 다르지요. 기억은 아주 소박합니다. 녹번동은 나지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덕 북쪽 아래의 어느 골목길이 기억납니다. 해 지기 전의 오후 시간 조용한 주택가를 지났습니다. 젊은 여인 두엇이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고 있었고, 어떤 여인들은 길가에 모여 서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몇 명이 길에서 놀고 있었던 듯합니다. 평범한 장면이랄 수 있지만 그 동네의 정경이 무척이나 평화로운 그림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골목의 기억은 베르테르와 로테가 담소하며 거닐던 길인 양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추석 연휴 중 사흘째 되던 저녁, 그 길을 찾아보러 나섰습니다. 세상이 변해서 못 찾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꽤나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쏘다녀 보았는데 기억과 비슷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독 주택들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다세대주택을 비롯한 새 집들이 들어선 곳에선 그 정겹던 골목 풍경을 떠올리기 어려웠습니다. 예전엔 없던 자동차들까지 오가니 낯선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니까요. 그래도 걸으면서 평화로운 광경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은 즐거움은 있었습니다. 여러 골목을 헤맨 뒤에 포기하고 갈현동의 집을 향해 걸으며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억 때문만은 아니고 오래 살아온 지역이니 정이 생겨서 그런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 정이 지역에 대한 부채감(負債感) 같은 것과도 어우러져 있습니다.

은평구에는 1950년대에 설립된 사회사업 기관이 있습니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결핵 환자 치료 병원도 있습니다. 병원에 수용된 결핵 환자들은 예전의 규정에 의하면 3년이 되면 병이 낫지 않아도 퇴원해야 했습니다. 그들 중 연고 가족이 없는 이들은 병원 울타리 바깥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사회사업 기관의 존재는 고등학교 때 전해 들어 이름만 알고 있었고 환자촌은 신입사원 시절 회사 사람들과 같이 한번 방문하였습니다. 그 후 수십 년간 그 둘 중 어느 한 곳에도 관심을 갖지 못한 일로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몇 해 동안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여 사회사업 기관에 수용된 이들 옆에 같이 있어 주는 일을 실행했습니다. 언젠가는 병원에서 나와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을 돌보던 교회를 찾아 나섰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일대가 모두 주택가로 변했지만 천막교회가 벽돌교회로 변하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반가웠습니다. 이런 정도의 행동을 한 것으로 부채감을 얼마간 덜었습니다.

근래에는 가까운 곳에서 지역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작년 가을 집 근처에 재활용품 수집장이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거기를 지날 때면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되고 때로는 그 앞에 서서 길 양편을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전에 못 보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파지를 비롯한 재활용품을 나르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령자들입니다.

지난 7월말 6시를 좀 넘긴 아침 재활용품 수집장에서 나오는 여인을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은 방향이었으니까요. 뒤따라 걷다가 어느 곳에서 파지를 모으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파지를 수집하시는군요. 저 위쪽의 제 집에 얼마간 있으니 여기서 기다리시면 가져다 드릴 게요.” 몇 분 뒤 짐을 들고 내려와 그의 작은 손수레에 얹었더니 그는 허리를 굽히며 여린 목소리로 몇 차례나 고맙다고 했습니다.

8월초에 다시 한 번 같은 장소에서 다른 여인에게 집에 있던 파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물었습니다. “가져가시면 얼마 받나요?” “킬로그램에 사십 원 해요. 이거 다 해 봐야 얼마 안 돼요. 그래도 책이 있으니 (부피에 비해) 삼사 킬로는 더 나가겠네요.” “연세도 높으시니 자식들이 벌 텐데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일이 시원치 않아서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걸요.” “그럼 파지 판 돈을 아드님에게 주시나요?” “그러진 않아요.” 더 이상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아내는 나의 행동을 나무랐습니다. 파지를 길가에 그냥 두지 않고 왜 특정인에게 갖다 주느냐고 했습니다. 그 나무람은 불공평한 일을 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깐에는 힘 약한 여인에게 제공하느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한 일을 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후로는 파지를 길가에 내놓기만 하고 있습니다.

속으로 놀란 일도 있습니다. 수레를 끌며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그들이 어딘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인식이 마음속 한구석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들이 저기 서오릉 고개 너머 사람들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골목들을 지나며 살펴보니 집에서 수레 끌고 들고나는 노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 데 사람이 아니고 이웃이었습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파지 약간 모은 것을 제공한 나와 그들을 모르는 동네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의 공존에는 어떤 모순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지역에 대한 부채감이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변하고 있는 듯해서 좋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공평인지 아닌지 작은 갈등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웃을 진정한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의식이 있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대한 부채감이 숙제처럼 남았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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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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