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가 있는 풍경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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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가 있는 풍경

2019.09.11

제가 사는 영동에는 가로수가 감나무입니다. 영동군 인구보다 가로수로 심은 감나무가 더 많아서 5만 그루가 넘습니다. 게다가 가을에 곶감을 만들 작정으로 개인들이 심은 감나무를 포함하면 10만 그루는 될 것 같습니다.

감나무 잎새가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들면, 거리는 축제를 하는 날처럼 온통 붉게 물들어 버립니다. 감 수확은 군청에서 일괄적으로 하지 않고 길가에 있는 집주인이나 논밭 주인이 합니다. 이를테면 감나무는 군 소유지지만, 감은 군민의 몫이 되는 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마당이 있는 집에는 여지없이 감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감나무는 다른 과일나무와 다르게 유난히 잎새가 무성합니다. 여름날이면 감나무 밑에 멍석을 깔아 놓거나 평상을 놓는 집이 많습니다. 점심이나 저녁은 더운 방안 대신 평상에 앉아서 먹으면 한결 시원합니다. 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평상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덮고 선잠을 자기도 합니다.

감이 익어가기 시작하면 홍시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마당이며 골목에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는 맛은 꿀맛이 따로 없습니다. 새벽이슬에 차게 식혀진 달콤한 과즙의 향이 입안에 가득 차오릅니다.

일요일에는 좀 더 멀리 원정을 가기도 합니다. 중학교 뒷산에 감나무 10여 그루가 있었습니다. 감나무 밑은 콩밭이라 홍시를 주우려면 바짓가랑이는 물론이고 셔츠까지 새벽이슬에 축축하게 젖어 버립니다. 그래도 멀쩡한 홍시는 아버지 몫으로 챙기고 깨지거나 갈라진 홍시는 들고 갈 수가 없으니까 그 자리서 먹습니다.

근처에는 늙은 호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친구들과 낮에 호도를 따러 갈 때는 ‘팔봉이’가 있는지 살펴봅니다. 팔봉이라는 분은 환갑이 지났는데도 애 어른 할 것 없이 ‘팔봉이’라고 불렀습니다.

팔봉은 호두나무와 감나무뿐만 아니라 산 전체를 지키는 '산지기'였습니다. 호도를 따거나 감을 딸 생각으로 산에 오르기라도 하면 멀리서부터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라!”라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옵니다. 대개 지겟작대기나 회초리 같은 것을 들고 뛰어오는 까닭에 아이들은 꽁무니가 빠지라고 도망을 칩니다.

팔봉이는 난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일 년 내내 빡빡머리 모습을 하고 있는 팔봉이에게 붙들려서 매를 맞거나 혼이 난 아이들은 없습니다. 멀리서부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는 까닭에 충분히 도망을 칠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산은 모두 민둥산이지만 팔봉이가 지키는 산은 소나무며 풋나무들이 무성합니다. 누가 팔봉이 모르게 나무라도 할라치면 산림감독들처럼 살금살금 걸어와서 버럭 고함을 지르지 않습니다. 감이나 호도를 따려는 아이들을 쫓을 때처럼 멀리서부터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 어떤 놈여!”라고 미리부터 고함을 지릅니다. 어쩌다 나무를 하는 현장에서 들켜도 산감(山監)처럼 나무를 빼앗지는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갈겨 버릴 것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꾸중만 하고 쫓아 버립니다.

장날 파장이 될 무렵이면 장터에서 팔봉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어른들이 키가 작아 뒤뚱거리며 걷는 팔봉이를 보면 “어이! 팔봉아, 어여 와서 술 한 잔 해라!”고 부릅니다. 팔봉이는 망설이지도 않고 히죽이 웃으면서 선술집으로 들어갑니다. 팔봉이는 나이가 열댓 살 차이가 나는 어른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달게 마시고 또 다른 선술집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늦가을의 홍시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진 팔봉이는 얼큰하게 취기가 돌면 합죽합죽 웃으면서 뒤뚱뒤뚱 걷습니다. 아이들이 흉내를 내며 뒤를 따라가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팔봉이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마는 둥 학교에 다니는 흉내만 내고 객지로 나가 버렸습니다. 명절 무렵이면 머리에 번지르르하게 기름을 바른 아들하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짙은 화장을 한 딸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객지에서 살다가 명절을 쇠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친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장터나 쇠전거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팔봉이 자식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다가 명절을 쇠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명절 끝에 삼거리 버스정류소에서 보면 객지로 나가는 자식들을 배웅하고 있는 부모님들이나 형제들이 많았는데, 팔봉이가 자식들 배웅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산지기 팔봉이가 어른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장남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동아건설의 철근공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후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3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휴가를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는 겁니다. 그 돈으로 논과 밭도 사고 번듯한 집도 지었습니다.

장남은 팔봉이만큼이나 천성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자기 일은 물론이고, 동네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몇 년 되지 않아서 이장이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농자금을 만 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이장한테 잘 보여야 하고, 비료를 한 포라도 더 받으려면 담배라도 한 갑 사서 주머니에 찔러줘야 합니다.

이장의 지위가 면사무소 공무원하고는 동급이고, 농협조합 직원하고는 술친구가 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은 팔봉이를 동네 개 이름 부르듯 부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이장 아버지라고 부르더니 나이를 먹어 산지기를 그만둘 무렵에는 어르신으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장날 저잣거리를 히죽히죽 웃으며 뒤뚱뒤뚱 걸어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이장이 매일 하루 동안 마실 막걸리를 사다 드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팔봉이는 시들시들 앓다가 어느 봄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지금도 팔봉이가 지겟작대기를 들고 지키던 산자락에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습니다. 재래종 감이라 곶감 만들기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서리가 내리도록 감을 따는 이들도 없습니다.

감나무는 저 혼자 봄이면 감꽃을 피웠다가, 가을이 되면 홍시를 만들어서 새들에게 공양하고 저 혼자 겨울을 맞을 뿐입니다. 마당에 서 있던 감나무들도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감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평상 대신 창고나, 개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감나무 밑이나 홍시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도 주워 먹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행여 깨지지 않은 홍시를 아이가 주워 먹으려고 하면, 엄마가 기겁하며 홍시를 빼앗아 던져 버립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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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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