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 사람에 관한 글 두 편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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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 사람에 관한 글 두 편  

2019.08.30

1. 못 쓰게 된 제목 ‘일본이 좋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는 바람에 오래전부터 여퉈왔던 글 한 편이 날아갔습니다.
‘일본이 좋다’라는 제목으로 쓰려 했던 글입니다. 일본 TV 먹방 ‘고독한 미식가’를 보다가 그런 글을 쓰려고 했지요.

그 먹방을 처음엔 안 봤어요. 우리나라 먹방도 안 보는데 일본 걸 볼 일은 더 없었고, 길기만 한 주연배우 얼굴도 별로 맘에 안 들었거든요. 또 일본 문화에 가까워진 적도 없고, 가까워보려 한 적도 없었단 말입니다. 일본 소설, 영화도 본 게 많지 않아요. 그런데, 어쩌다 ‘고독한 미식가’를 끝까지 한번 본 이후, 이 먹방은 물론 일본도 좋아할 만하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답니다.

이유요? 별것 아니에요.

음식도 한두 번은 먹을 만하게 보입디다만,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은 모든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고, 손님들도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예의를 보여주는 거, 그것 때문이었지요. 서거나 꿇어앉은 채 서로 몇 번씩 고개를 숙이면서, 찾아줘서 고맙다, 부족한 건 없었냐, 맛있는 거 먹도록 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들르겠다 …. 상냥함과 미소, 친절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 사람들 일상적 마음가짐이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최대한 편하게 해주겠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것들은 그 사람들의 겉모습일 뿐 뒤로 돌아서면, 집에 돌아가면 속에 들어 있는 무슨 소리, 무슨 짓이 튀어나올지는 모르지만, 겉모습부터 무뚝뚝하고 심술 가득한 채 서로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서비스 정신과 배려 …. 우리가 항용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그리워하기도 하는 마음씨. 그런 게 왜 우리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나 하면서 본 거지요. 글에 써먹으려고 식당 사람들과 고객이  주고받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인사와 감사의 표현도 메모장에 베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좋다’라는 글은 이제는 쓰기가 어렵게 됐네요. ‘일본도 좋다’라고 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쓸 수 없는 글이 있다는 것, 그게 슬픈 일인 듯합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나에게도 적용되려나 ….

‘일본이 좋다’라는 글을 포기했던 즈음 어느 아침,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려는데, 축구공이 찻길로 굴러들어왔어요.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사내아이가 보도에서 차도로 뛰어들다가 내 차가 오는 걸 보고 그 자리에 서더라고요. 차를 세우고, 공을 집어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얘가 후다닥 공을 들고 인도로 나갔어요.

차가 다시 움직이는데, 인도 위에 있던 그 아이 친구가 차 속의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젖살이 다 안 빠져 볼이 아직 통통한 아이가 차를 세워주고 친구가 공을 찾도록 해준 데에 감사 표시를 한 거예요. 그냥 흐뭇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얘야, 자라서도 감사할 줄 아는 그 마음 잃지 마라!”

2. ‘8.15’-우리 형제들의 별명

이번 광복절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초등학교(1905년부터 보통학교, 1938년부터 소학교, 1941년부터 국민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태어나 살던 산골에서 나와 그 일대에서는 가장 대처인 안동의 한 일본인 빵가게에서 빵 일을 배웠습니다. 숙식 제공에 월급이 조금 있을까 말까 한 도제식 취업이었지요.

새벽 일찍 일어나 가마에 석탄불을 피우고 한겨울에도 웃통을 벗은 채 반죽을 치대야 하는 초보 일꾼(‘가마돌이’라고 불렀습니다)을 거쳐 앙꼬를 반죽에 싸는 정도까지는 이르렀습니다. 물들인 버터나 마가린을 짤주머니에 넣어 장미와 나뭇잎을 그리거나 주름장식을 테두리에 짜 넣는 케이크 기술은 배우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지요.

해방 후 얼마가 지나 빵가게를 내게 된 아버지는 간판을 ‘8.15제과점’이라고 달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 8남매는 ‘8.15집 아이들’이었으며,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우리를 부를 때 “야, 팔일오!”라고 했습니다. 누님, 큰형님, 작은형님도 ‘팔일오’였고, 나와 아우들도 ‘팔일오’였습니다.

‘8.15제과점’에서는 앙꼬빵(팥빵) 소보루빵(곰보빵) 쇼빵(식빵) 크림빵과 롤케이크 마들렌느 마카롱 스펀지 파운드 등 양과자와 모나카 센베이 요깡 같은 화과자(和菓子, 일본 전통 과자)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가게 뒤 공장 인력은 네 명이었지요. ‘가마돌이’가 제일 아래, 그 위에 ‘주산빠’(뜻은 모릅니다)가 있었고, 주산빠 다음 단계(직책 명이 기억 안 나네요), 맨 마지막에 케이크 장식을 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가마돌이와 주산빠, 그 다음 단계까지는 아버지처럼 도제식으로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며 양성됐지만 기술자는 제과 기술이 앞선 대구나 부산에서 스카우트해왔습니다. 그중에는 ‘8.15’에서 주산빠로 있다가 대도시로 나가 기술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골 빵가게보다 더 큰일 해보신다고 서울 부산 대구를 자주 내왕했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공장으로 들어가 직원들 사이에 서서 밀가루를 날려가며 앙꼬빵을 싸셨습니다. 주산빠일 때 해방을 맞았던 거지요.

방학 때면 간혹 서울에서 내려온 사단장 가족이나 검찰 지청장 가족이 ‘8.15’에 찾아와 메뉴에 없는 샌드위치를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샌드위치 만들기는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일이었습니다. 식빵을 똑같은 두께로 잘라서 딱딱한 테두리는 저며서 버리고, 프라이팬에 구운 후, 마요네즈를 바르고, 양배추와 오이 토마토를 참으로 정성스럽게 썰어 넣었습니다. 귀했던 달걀 프라이도 아버지가 직접 하셨습니다. 구경하는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안 본다고 대충하면 안 되지. 일본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해. 남이 보건 안 보건 배운 대로, 아는 대로 하지 ….”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마돌이들에게 앙꼬빵 싸는 걸 직접 가르칠 때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일본 사람들이 일을 잘 한다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잘 한다고, 거기에 대면 우리는 아직 멀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해방이 기뻤던 모양입니다.. 서울 부산 대구의 일류 제과점이 ‘뉴욕’ ‘고려당’ ‘프린스’ ‘황태자’ ‘에튜드’ '태극당'  같은 품위 있는 이름을 걸었을 때, 저기 경북 북부의 작은 도시 안동에서 ‘8.15’라는 당당한 간판으로 장사를 시작했으니까요.

‘8.15제과점’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빵공장(기계로 반죽을 치대고, 컨베이어 벨트가 그걸 나르는)을 운영해보기로 하면서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하여튼 우리 형제들의 별명은 ‘8.15’였습니다. 지금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초등학교 동창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유난했던 이번 광복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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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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