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업 이야기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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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산업 이야기

2019.08.26

2000년대 들어서 가발 산업과 관련된 분야를 여러 해에 걸쳐 간헐적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발 산업은 한때 수출 부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생산을 하지 않는데 세계 시장에서 한국 회사들이 사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들은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 작은 산업은 이렇게 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이후 높아진 한국의 인건비로는 가발 생산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가발의 주원료로 사용되던 인모(人毛)의 공급도 부족했습니다(시간이 지나면서는 인조 모발의 사용이 늘었습니다).

원가 상승과 원료 조달의 문제로 한국에서 생산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기업은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선택은 생산 기지를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하는 거였습니다. 중국과 국교를 트기 전인 80년대 초반 중국에 공장을 차린 기업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90년대에는 중국 기업도 가발 생산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떤 회사는 80년대 초반 아프리카로 진출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수출하는 제품을 생산하였지만, 아프리카로 간 기업은 현지 시장 판매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군요. 가발 제품은 크게 흑인용과 비흑인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흑인들은 태생적으로 가발을 필요로 합니다. 머리가 풍성한(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흑인은 거의 모두가 가발을 착용한 것이지요. 그러니 아프리카는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이었지만 성장 잠재력은 높은 시장이었습니다.

해외 진출의 다른 유형은 미국 현지 시장의 유통에 뛰어든 것입니다. 가발 생산회사의 영업부서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단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서 가발 수입과 도매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도 흑인용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도매업만이 아니라 소매업에도 한국인들이 진출했습니다. 소매업에 진출한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가발 사업 경험자들보다는 이미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생계형으로 뛰어든 사례가 대부분이었다고 짐작합니다. 지금도 큰 변화가 없지만,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80년대 초반에 흑인 거주 지역은 위험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가발 유통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만이 아니라 다른 인종도 흑인 거주 지역 출입을 꺼렸답니다. 그러나 한국 이민자들은 흑인들 거주 지역에 가발 소매점을 열었습니다.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대하며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전과는 비교 안 되는 낮은 가격에 공급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수입·도매상과 소매상을 한국인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소매상은 전국 단위의 미용재료상 연합회와 지역 분회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수입·도매상 연합회와 미용재료상 연합회는 각기 매년 산업전시회를 겸한 총회를 열고 있습니다. 현지의 업계 잡지가 한국어로 발행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규모를 알 만합니다.

아프리카를 제외한 지역의 생산 회사는 인건비 낮은 지역으로의 생산 기지 이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중국 내륙 지방의 대형 공장들은 방글라데시 같은 곳으로 이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 진출했던 한국계 회사도 이미 동남아나 서남아 지역으로 이전했습니다. 사업에 뛰어든 초기에는 가격 우위를 지녔던 중국 기업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한국 기업 대비 우위는 잃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국 가발회사와 그 종사자들은 한국에서의 사업 운영이 어려워지니 그 돌파구로 생산 기지 이전, 시장 유통망으로의 진출, 성장 가능성 있는 시장으로의 진출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발버둥을 친 것이지요. 그 결과 한국 가발 기업은 이미 80년대에 글로벌화를 이루었습니다. 90년대 한국에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세계화 바람이 불었는데 그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미국에서 독보적인 지위에 있는 한 수입·도매상은 아프리카에 계열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아프리카 회사는 그 지역 여러 나라에서 생산,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제품은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의 판매 계열사에까지 공급합니다.

가발 회사는 중소기업이지만 환경 변화에 잘도 적응해 왔습니다. 사업을 글로벌화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회사와 개인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 온 결과입니다. 그 결과 산업의 주도권을 다른 지역으로 뺏기지 않고 오히려 한국 회사들의 파이를 키웠습니다. 미국 시장 유통에 뛰어들어 부가가치를 높인 일이며 아프리카라는 신흥 시장을 개척한 일이 그러합니다.

이제 한국에서 가발 공장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가발 판매점은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완용 가발 또는 패션 가발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즉 부가가치 높은 비흑인용 제품의 한국 내 유통량이 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분야도 생산이야 오래전부터 해 왔는데 유통업까지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세계 시장 유통에도 나설지 모를 일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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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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