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친일파인가? [임종건]





www.freecolumn.co.kr

누가 친일파인가?

2019.07.29

지난 7월 1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3종 부품의 수출을 규제키로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일 간에 전례가 없던 이 무역전쟁이 어디로 가고 있고, 얼마나 오래 끌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이 전쟁의 피해는 기술 우위를 무기로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가하는 ‘갑질’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측의 피해가 일본에 비해 클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나, 우리가 잘만 대응하면 한국 경제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가 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정부를 믿고 따라주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자 도리이다. 우리에겐 1997년 외환위기로 나라의 경제주권이 국제통화기금(IMF)에 넘어갔을 때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극복한 경험도 있다. 이번은 숙적인 일본이 도발한 전쟁이므로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데 외환위기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처방에 대해 정부와 견해를 달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정부 여당 사람들은 그런 국민을 친일파, 이적행위자 심지어 매국노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은 국민을 배상과 보상의 차이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취급하며 법을 가르치려 들고 있다. 그런 사람이 법무장관 물망에 영순위로 올라있다. 정부가 나서서 국민을 친일파로 만들고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적전분열(敵前分裂)도 없다.

싸움에서 감정이 앞서면 이기기 어렵다. 정부와 여당은 일제 때의 국채보상운동, 임진란 때의 의병, 동학혁명 때의 죽창가, 고려 때의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까지 들먹이며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나 많은 국민은 ‘그렇게 해서 이기겠냐’는 식으로 냉소를 보내고 있다.

일본은 해묵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국 대법원의 징용자재판 결과를 구실로 선전포고했다.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끝났음에도 계속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계약위반이라는 주장이다.

그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이 10억 엔의 예산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위로금을 만들어,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양국 간에 어렵사리 합의가 이뤄졌다. 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이었던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은 정부 예산으로 위로금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징용자재판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위안부보다 더 강경했다. 이는 앞으로 있게 될 북한과의 청구권협상은 물론 중일전쟁, 대동아전쟁 때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아시아 국가들의 민간인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징용자 재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요청에 대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처방법을 찾는 과정이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혐의인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과의 재판거래 혐의이다. 이 사건 수사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됐다.

반면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한 문재인 대통령은 징용자재판에선 삼권분립의 원칙을 내세워 오불관언의 자세를 보였고, 진보성향의 대법원장을 임명함으로써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은 쉽게 나왔다. 일본 정부로선 한국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짜고 친 판결이라고 의심할 만했고, 그것을 무역전쟁 돌입의 구실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5억 달러에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이 한국에게 미흡했고 굴욕적이었다는 기억은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시작된 필자의 학창시절의 구호 속에도 남아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돈을 우리가 허비한 게 아니라 한국을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키우는 종잣돈으로 유용하게 썼기 때문이다. 당시 약소한대로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으로도 지급됐다.

우리가 먹고살 만큼 된 마당에 일제 강점기에 당한 우리 조상들의 피해보상이 미흡했다면 그것은 오늘의 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더 떳떳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개인 송사에서도 상대가 갚았다고 잡아떼는 빚을 받아내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다.

가해국인 일본의 법원에서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한 판결을 국제중재법원도 아닌 피해국 법원에서 뒤집었다 한들 가해 측이 호락호락 내놓을 리도 없다. 이런 뻔한 이치를 알면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법률적으로만 숭고한 판결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친일파가 된다 해도 필자는 하나도 억울할 게 없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