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뒷골목을 헤매는 사람들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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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뒷골목을 헤매는 사람들

2019.07.01

서울의 종로는 추억의 거리입니다. 60대 이상 선배들과 종로의 선술집에서 만나면 땡땡거리던 전차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K 선배가 늘 선수를 치지요. “쉰다섯 살 아래로 손 들어! 너흰 전차 귀경도 못했지, 불쌍한 것들. 오늘 이 자리는 두 부류로 나눈다. 전차를 타 본 사람과 못 타 본 사람으로.” 그러고는 “일천구백육십사 년 서울로 이사와 중핵교를 댕길 때 늦잠을 자 부리나케 나간 날이면 막냇동생을 등에 업은 엄니가 보자기에 싼 ‘변또(도시락)’를 들고 달려와 전차를 멈춰 세우곤 하셨지. 돌아가신 우리 엄니가 엄청 보고 싶네. 자, 다들 한 잔해. 아니다, 전차 타 본 그룹만 한 잔” 하며 눈물을 쓱 닦곤 하지요.

눈치 없는 후배 M이 “트램(Tram) 말이죠? 노면 전차. 뭐 타 보진 않았지만…” 하고 잘난 척하려 들면 P 선배가 벌떡 일어나 “트램이고 나발이고 우리한테 그건 그냥 전차인기라. 젊은 날의 추억이 가득한 381호 전차” 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1968년 발표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입니다. 노랫말을 몰라 젓가락 장단만 맞추다 보면 “첫사랑 떠나간” 마지막 소절에서 첫사랑이 떠올랐다며 L 선배가 그녀의 이름과 함께 ‘르네상스’를 외칩니다.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브람스 음악을 함께 들었던 그녀랍니다.

L 선배가 “르네상스는 당시 최고의 음악감상실이었지”라고 치켜세우면 어김없이 W 선배가 “쳇! 무슨 소리야. 음악감상실 하면 세시봉이지” 하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클래식의 ‘클’자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 드나든 게 자랑이냐? 감미로운 통기타 소리 울리던 세시봉이 최고지.” L 선배가 그냥 있을 리 없습니다. “맞아. 술이나 한 잔해. 건배사는 이거야. 세시봉은 양아치, 르네상스는 신사!”

세시봉에도 르네상스에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1960~70년대 종로의 모습이 흑백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문을 열면 자욱한 담배 연기(당시엔 웬만하면 실내 흡연이 다 허용됐을 것으로 생각함) 속에 올드 팝송이 흐르는 음악감상실, 양쪽으로 팔걸이가 있는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엘피(LP)판을 틀어 놓고 ‘오늘은 왠지’로 시작하는 끈적끈적한 멘트를 날리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디스크자키…. 

내 기억 속 종로엔 ‘종로서적’이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20·30대 때 애용했던 약속 장소거든요. “거기서 만나” 하면 으레 종로서적으로 나갔죠. 나 같은 이들이 많은 탓에 서점 앞은 늘 북적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머리를 굴린 청춘들은 ‘6층 문학코너’나 ‘4층 인문코너’에서 만났더군요.

돈 좀 있는 연인들은 종로서적 맞은편 화신백화점에서 데이트를 즐겼지요. 전형적 근대 건축물이었던 화신백화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엔 종로타운이 우뚝 서 있습니다. 

종로서적도 인터넷 서점과의 경쟁에 치이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전 국민이 월드컵에 빠져 있던 2002년 6월 4일의 일입니다. 그날 우리 축구대표팀이 폴란드를 이기면서 국내 거의 모든 언론사가 ‘월드컵 첫 승리’ 뉴스에 집중했죠. 한국 최초의 서점 종로서적은, 그래서 너무도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통탄한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안경환 당시 서울대 법대학장이 신문에 기고한 ‘종로서적이 망했는데 그깟 월드컵이 대수냐’라는 글을 읽으며 저 역시 분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종로서적은 2016년 겨울, 폐점 14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옛 종로서적 자리가 아닌 맞은편 종로타워 지하 2층(옛 반디앤루니스)에 자리를 잡았죠. 6층까지 이어진 좁고 가팔랐던 계단도, 서가 사이에 주저앉아 책을 읽는 이들도, 새로운 약속 장소를 알리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이름만 같은 종로서적입니다. 그래도 반갑습니다. 오래전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지나온 나의 흔적을 찾을 공간이 있다는 건 큰 즐거움입니다. 현대인이 겪는 아픔 중 하나는 ‘추억 공간’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요.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과의 이별은 고통입니다. 선배들은 381호 전차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첫 입사했던 회사 앞 중국집이 사라지는 사이 든든하게 기댔던 부모님, 선배, 친구들의 빈자리도 하나하나 늘어났다며 아파합니다. 많은 이들이 모임 장소를 종로로 잡는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혹여 종로 뒷골목에 아직 남아 있을 추억을 찾고 싶은 게지요. 사라진 추억의 장소들이 되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종로의 변신이 더뎌지길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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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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