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성토장 돼버린 세계보건기구 [허영섭]



www.freecolumn.co.kr

대만의 성토장 돼버린 세계보건기구

2019.05.30

세계보건기구(WHO)가 대만의 장외투쟁 무대가 되어 버렸다. 그 의사결정 기구인 세계보건총회(WHA)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대만이 올해도 초청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옵서버 자격의 참가 요청이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만 영토를 자신의 관할로 간주하는 중국이 거부 의사를 표명한 결과다. 지난 20일 열린 제72회 WHA 연차총회가 엊그제 폐막되기까지 일주일 남짓 대만의 민관 대표단이 회의장 주변을 맴돌면서 자신의 위치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대만의 WHA 참가가 좌절된 것은 올해로 연달아 3년째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취임한 이래 중국의 견제가 이어지는 중이다. 대만 정부 대표단의 참석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 기자단의 취재까지 전면 봉쇄됐다. 차이잉원이 이끄는 민진당 정부가 대만 독립을 표방하며 중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마찰이다. 2016년 참가신청 마감시한이 임박해서야 도착한 초청장에 “앞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례적인 조건이 붙어 있었던 것이 지금 사태에 이른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대만이 전임 마잉지우(馬英九) 총통 시절이던 2009년부터 WHA 참가가 허용된 것이 중국의 양해에 따른 덕분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민당 정부가 적극적인 양안 관계개선 움직임을 보아면서 중국이 그동안 틀어 막혔던 국제무대의 숨통을 열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그나마도 옵서버 자격이었다. WHO가 유엔 산하기구지만 대만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므로 불가피했던 상황이다. 그런데도 대만으로서는 국제기구 활동 참여 차원에서 WHA 참석을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올해 대만의 WHA 참가 여부를 둘러싸고 진행된 논란 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과거와 달리 중국 정부가 직접 표면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중국 외교부의 겅솽(耿爽) 대변인이 “대만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WHA 참가에 동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미리부터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홍콩 출신인 마가레트 천(陳馮富珍)에 이어 2017년부터 WHO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게브레예수스의 개인적인 성향에 책임을 돌릴 문제는 결코 아니다.

반면 대만 측도 올해 장외투쟁에서 상당한 소득을 올린 것으로 자평하고 있다. 비록 총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어도 국제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지지가 두드러졌다. 알렉스 아자르 미국 보건부장관은 총회 발언을 통해 “대만의 2,300만 명 국민도 다른 나라 국민들처럼 이 자리에서 말할 자격이 있다”면서 WHO 사무처가 대만에 초청장 발급을 거부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대만 수교국들이 대만 문제를 거론했으나 의제에서 제외되자 공개 반론에 나선 것이었다.

더욱이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대만의 WHA 참가 노력을 지지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으로써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방침을 확인시켜 주었다. 국무부에 대해 대만의 WHA 참석과 관련한 진전 상황을 해마다 보고토록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대만을 견제하는 중국에 있어서는 상당히 신경 쓰일 만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현재 무역마찰과 관련해 샅바싸움이 벌어지는 미·중 관계에 대만 문제가 갈등을 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 영국과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서방국가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대만을 지원하는 발언이 잇따랐다. 주목되는 것은 일본까지 대만 지지 대열에 공식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공중건강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도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상의 트위터 언급이 그것이다. 일본 외무상이 공개적으로 대만의 WHA 참가 필요성을 거론한 것은 양국 관계가 단절된 1972년 이후 처음이라는 것이 대만 측의 설명이다.

주변국들의 지지 움직임을 떠나서도 대만 나름대로 홍보 활동도 작지 않았다. 천스쭝(陳時中) 보건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대표단이 제네바 현지에 파견돼 각국 대표단이나 NGO 단체들과 만나 대만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입장이라는 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에볼라 바이러스와 중동호흡기중후군, 뎅기열 등 신종 전염병이 자꾸 등장하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국경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현실을 강조하며 대만의 국제적인 보건의료 증진 노력 소개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국의 방어막이 견고하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만 주변국들의 지원이 확대될수록 중국의 대응 방안도 강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지금껏 주변국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만이 WHA는 물론 인터폴이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정식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대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이러한 구도는 앞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보건의료 업무가 정치 역학에 따라 흔들리는 현실을 말해준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