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배나무의 전설 [김홍묵]


팥배나무의 전설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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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배나무의 전설

2019.03.18

감당애(甘棠愛)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당나무를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정치를 잘 하여 선정을 베푼 사람을 사모하고 칭송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춘추시대 주(周)나라 초기 소공석(召公奭)이 감당나무 아래서 송사와 정사를 처리한 데서 유래한 중국 고사입니다.  
소공은 연(燕)나라 시조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순시하는 마을마다  감당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서 공정한 재판을 하고, 적절한 정책을 펼쳐 나라 안에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전국에 감당나무를 심고 길렀으며, ‘감당’이라는 시를 지어 그의 공덕을 기렸습니다. 시경(詩經) 국풍(國風)편에 ‘감당’ 시가 실려 있습니다.
싱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베지도 마라/
소백님이 일하신 곳이니/
싱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꺾지도 마라/
소백님이 쉬시던 곳이니/
싱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휘지도 마라/
소백님이 머무신 곳이니 (소백-召伯-은 연나라 왕 소공석을 일컬음)

그 감당나무가 바로 팥배나무입니다. 열매는 팥을 닮고 꽃은 배꽃을 닮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름만으로는 배나무와 연관이 있을 법하지만 실은 장미과입니다. 키가 15~20미터나 크게 자랍니다. 4,5월에 하얀 꽃이 피고, 9,10월이면 지름 1센티미터 가량의 타원형 열매가 조랑조랑 주황색으로 익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산허리에 터를 잡아 부부가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7,8년째 봄갈이 가을걷이 일을 거든다는 명목으로 일 년에 두어 번씩 들렀지만, 나무 이름을 건성으로 듣고 지나치다 올봄 고이 간직했던 팥배나무 술대접에 눈이 활짝 떠졌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만 나무도 수천 수(壽)를 누리며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서입니다. 

나무는 인간 출현 훨씬 전부터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세기, 40일 간의 홍수로 지구가 물에 잠겼을 때 노아의 방주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날려 보낸 비둘기가 물고 온 나뭇가지가 올리브나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홍수가 끝난 사실을 알고 비로소 사람이 땅에 정착했다고 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감람(橄欖)나무가 올리브나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존경스러운 나무가 많습니다. 세조가 벼슬을 내렸다는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 세금 내는 소나무 경북 예천의 석송령(石松靈), 매년 봄 막걸리 몇 말씩을 마시는 경북 청도 운문사 경내의 처진소나무 등입니다. 그 품격과 오묘한 자태는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합니다.

제사에 쓰는 과일 조율이시(棗栗梨枾)도 각자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대추나무는 헛꽃이 없이 많은 열매가 달립니다. 대추(棗)는 왕의 용포와 같은 붉은색으로 왕이나 성현이 될 후손이 나오길 기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밤(栗)은 조상과 후손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합니다. 이런 이유로 밤나무로 된 위패를 모십니다. 배(梨)는 씨가 6개로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뜻합니다. 감(枾)나무는 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나옵니다. 3~5년 후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감이 열립니다. 사람이 태어났다고 사람이 아니듯 가르치고 배워야 사람이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의 귤나무를 강북으로 옮기면 탱자가 열린다[南橘北枳 남귤북지]는 말처럼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짐을 비유한 고사와 같은 맥락입니다.

반대로 저주와 재앙으로 시달렸던 나무도 적지 않습니다. 오얏나무(자두나무)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한양에 오얏[李=木+子; 이 씨를 가리킴]나무를 심었다가 모두 베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는 실제로 한양에 벌리사(伐李使; 오얏나무 벌채꾼)를 보내 오얏나무를 모두 벌목하기도 했습니다. 이 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圖讖)인 목자득국설(木子得國說)에 대한 반작용입니다. 
지구의 허파인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이 개발 명목의 벌채로 멍들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수림이 사막화로 절멸되어 가는 상황은 인간의 욕망과 온난화에 따른 재앙입니다.

아무튼 나무는 유사 이래 인간과 떼어낼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나무는 가구 건축 조각 종이 약재의 재료는 물론 수많은 먹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목적에 따라 용재림(用材林) 사방림(沙防林) 방풍림(防風林) 어부림(魚付林)이 있는가 하면, 공기정화 홍수방지 소음차단 등 다양한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 땅과 네 땅을 구분하여 쳐놓은 담장 너머까지 나무는 가지를 뻗고 열매를 달아 공유할 수 있게끔 하는 포용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굽은 소나무가 선영을 지키듯 못난 나무도 제 역할을 다합니다. 하찮은 부지깽이 바지랑대 지게작대기 등속도 일회성 아닌 반영구적으로 사람의 손길을 도와줍니다. 

전국 도시의 빌딩이나 고속도로 화장실 곳곳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잠언이 붙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앉은 자리도 아름답다-고.
손톱만 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감당나무가 수천 년 수명을 이어오고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 연유가 그 나무 아래 앉아서 어진 정사를 폈던 소공석의 선정 때문이었다니 화장실 잠언이 더욱 돋보입니다. 
우리도 정치를 잘한 사람을 기리는 감당애의 마음으로 아끼고 보호하는 나무가 여럿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해봅니다. 사람조차 존경받기 힘든 나라이니 더 막연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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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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