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강연은 안 합니다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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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강연은 안 합니다

2015.01.12


연초에 이런 ‘쪽지’를 받았습니다.  

쪽지:  ㅇㅇ고등학교 TED 기획팀입니다. 이번 2월에 저희 학교에서 TED를 개최하는데강사님을 강연자로 초청하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 강연 제안은 감사한데, TED가 뭡니까?  

쪽지: 하나의 주제 아래 다양한 강연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행사입니다. ‘나의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강사 당 30분 강연에 20분간의 질의 응답이 있습니다. 오후 4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진행됩니다.  

나: 그거 참 흥미롭군요. 특히 학생들을 상대로 한다니 신선합니다. 기성세대로서 책임감도 느껴지구요. 

이쯤에서 ‘쪽지와 나’는의기투합하여 마치 술자리 2차 가듯이 자리를 이메일로 옮겨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을 의욕적으로 점검하며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 시키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것은 말해 주지 않는 ‘쪽지’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나: 그런데 강연료는 얼마입니까? 

쪽지: 애초에 TED는 서로의 지식을 공유한다는 취지여서 강연료는 따로 없구요, 다만 저녁 식사와 간단한 다과가 제공될 예정입니다.

‘이런, 개 같은 소리가 있나, 누가 저녁 얻어 먹겠다고 6시간을 추위에 떨고 있겠나?’

나: 저는 강연료 없이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붕어빵을 팔아도 재료비가 있는건데, 지적, 인적, 무형의 자원을, 경우에 따라선 한 사람의 인격과 지혜를 통째로 빌리는 건데 어떻게 수고료를 전혀 책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식 공유 취지라 하셨는데 그 지식은 거저 생겼답니까? 땅 파서 공부했답니까? 그렇게 행사를 진행해서는 안 됩니다. 뜻을 같이하여 동참하겠다는 분들에게는 예외겠지만 저는 사양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 얘기를 했다면 저도 보수 없는 강연을 생각해 보았을 겁니다. 성인도 아닌 학생들 상대이니 보람있는 일이지만, 강단에 서지 못해 안달 난 사람도 아니고 불쾌하고 자존심 상합니다. 

쪽지: (응답없음)

일이 깨졌기에 하는 말이지만, 다짜고짜 영어를 쓰는 ‘쪽지’의 태도도 밉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TED가 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정의는 이렇습니다.

미국의 비영리 단체인 TED가 정기적으로 여는 강연회.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의 약자. 각 분야에서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무대. 동영상으로 제작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여줌. 등장 강사는 석학 등 전문가나 저명한 사람, 그 분야에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임.

“취지가 그러하다면 무료 강연을 해 줄 만도 하지 않냐”고 저를 나무랄 독자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누군들 자선 행위를 못할거며, 나아가 자선 단체 만드는 거야 ‘손 안대고 누런 코 풀기’지요. 

모르긴 해도 미국 TED도 동영상 배포를 무료로 할 뿐 강사들에게 소정의 강연료는 지급할 겁니다. 자기 희생은 없이 남의 돈, 남의 재능, 남의 시간 가져다가 좋은 일 하는 거야 누가 못할까 말입니다. 따라서 학교측에서 최소한의 강사료를 마련하고 일을 진행해야 맞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꿈나무, 방황하는 청춘들인데 어지간하면 해 줄 일이지.” 하고 저를 ‘돈 독오른’ 여자라 볼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기에 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강사의 면면을 보니 소위 ‘문사철’ 계통의 인사들이 초청되어 있던데, 자칫 학생들이 안다면 ‘인문학 쪽으로 나가봤자 공짜 강연이나 다니면서 가난뱅이가 되겠구나’ 라는 인식을 심어줄 게 아닙니까. 

더구나 주제가 ‘영혼의 울림’이라면서! 

영혼은 밥 안 먹고 울린답니까? 공짜 강연 자꾸 하다보면 ‘영혼의 울림’이 ‘영혼의 신음’이 될테지요. 몸이 있어야 영혼도 숨을 쉴게 아닌가요? 성경에도 우리 몸을 ‘성전’이라 했으니.  

좋다 만 데다, '열을 받아서' 2013년 4월 29일자 본 칼럼그룹에 썼던 <공짜 글은 안 씁니다>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 무렵 국내 유수의 경제 일간지 ‘H경제’에서 제게 ‘기명 칼럼’을 제안하면서 대신 원고료는 안 주겠다고 했습니다. ‘명예와 돈’을 속된 말로 ‘퉁치기’ 하자는 건데, 다른 것 보다는 이름을 중히 여기는 글쟁이의 약점을 파고 든 ‘수작’이라는 생각에 분개했었습니다.

설혹 내가 백원짜리 호떡을 만들어 판다해도 공짜로 달라고는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내 글이 호떡에 들어가는 한 줌 밀가루, 흑설탕 한 숟가락 값어치도 못 된단 소리니 비참한 한편 부아가 났습니다. 도대체 정신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업수이 여기고 깔보면 정당한 대가 지불은 고사하고 글을 거저 달라는 말이 나올까, 허탈과 비탄에 젖어 청탁을 해왔던 그 신문의 국장에게 아래와 같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제가 대가 없이 글을 쓸 때는 비영리 단체 등 공익성이 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살림이 매우 어려워 도저히 원고료를 지급할 수 없는 곳에 한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전자는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고 좋은 일에 동참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후자는 내가 가진 것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20년 넘게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정한 원칙을 지켜오며 글 쓰는 보람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사의 경우는 두 가지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기에 제게 하신 원고료 없는 청탁을 거절합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고료 지급은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지켜줘야 할 자존심에 대한 성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글쟁이로서 돈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정신 노동이나 문화 예술의 가치에 대해 몰염치한 한국 사회가 매우 걱정스럽고 더러는 분노하게 합니다.  

귀사는 타 매체에 비해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문화 예술의 존재 의미를 사회 저변으로 확대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온라인 상의 외부 기고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다니 매우 당황스럽고 실망이 됩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대표 신문으로서 언론계를 선도하고 잘못된 사회 관행을 바로잡고 계도할 위치에 있음에도 타 매체가 하는대로 유야무야 그저 작은 이익을 좇아 나쁜 행태에 휩쓸리는 태도는 지도적 매체답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매우 불쾌하겠지만 국장님 개인을 향한 질타는 아니므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경영진에 제 메일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메일을 보낸 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지금껏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답신은커녕 ‘흥, 제까짓 게 뭐라고. 우리 신문에 글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지.’ 하면서 콧방귀를 뀌었을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해야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바위를 뚫는 작은 물방울과 불이 난 숲속에 한 방울씩의 물을 담아 나르는 벌새처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고, 실상 그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현대는 온갖 것들이 상품화되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조차 버젓이 거래되고 있지만, 정신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상품으로서의 일말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거래되어서는 안 될 것과, 정당한 값어치가 주어져야 할 것들이 뒤섞여 우리 삶을 근원적으로 피폐시키고 있습니다. (후략)

이번에는 또 ‘공짜강연은 안 합니다’라는 글을 쓰면서 요즘 유행하는 ‘갑질’에 대비시켜 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갑’은 ‘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갑질'이 있으면 '을질'도 있다는 뜻입니다.'갑질'에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내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데 주눅이 들어 '알아서 기는, 자발적 '을질'을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갑을'은 쌍방이 계약관계를 맺는 중립적 용어임에도  언제부턴가 '갑질 을질'로 변색된 데에는 '갑'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라 '을'도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경력 란에 한 줄 추가를 위해서든, 내 글이 활자화되는 환희 때문이든, 내 얼굴, 내 목소리가 전파를 타는 게 황홀해서든 이유야 각각이겠지만 돈 안 받고 해도 불러만 줘도 자랑거리가 되는 풍조,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제가 아는 언론계통의 ‘알아서 을질’의 한 단면입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무료 원고 무료 출연'이 관행화, 고착화되는 것이지요.

세상 사 모든 원칙이 그렇 듯 내 값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우습게 보는 데 누가 나를 제대접해 주겠습니까. 내가 나를 지키는 한 상대로부터의 '갑질은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그나저나 왜 말 하는 도중에 '꼬랑지'를 말고 달아납니까? 'H경제'는 햇수로 2년째 답신이 없고, '쪽지'씨는 그 길로 줄행랑쳤습니다. 매우 비겁합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게스트칼럼 / 유능화

한국컴패션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늘 나와 같이하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색연필, 샤프펜슬, 지우개, 만년필, 그리고 자입니다. 

색연필은 주로 신문을 읽을 때 사용합니다.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정성스레 자를 대고 빨간 줄을 긋습니다. 모 일본 사업가가 한다는 방식을 흉내를 내다보니 어느덧 습관으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빨간 줄을 치면서 읽으면 짧은 시간에 정독을 하게 되고, 제대로 읽은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빨간 밑줄을 친 기사를 포함한 섹션은 인터넷 신문을 통해 클리핑을 해서 원노트(One Note)나 에버노트에 저장합니다. 나만의 신문 스크랩 요령입니다. 좋은 내용의 기사를 한 번만 보고 버리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어서 이렇게 저장해 두었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반추해서 소화를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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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부터 스완슨 목사의 노력으로 컴패션이 한국을 도왔습니다. 컴패션이 한국을 41년간 후원하며 1:1 어린이 양육으로 키워낸 아이들이 10만 명이 넘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난을 벗어나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컴패션은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컴패션의 도움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들을 중심으로 '이제는 받은 은혜를 갚을 때다'라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2003년 한국컴패션이 설립되어 현재 세계 26개국의 어린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컴패션은 첫해에 220명의 어린아이들을 후원했습니다. 10년 뒤에는 12만 명의 어린이들을 후원해 후원 규모는 11개 후원국가들 중에서 2위가 되었습니다. 한 해가 아니라 하루에 6,000명 이상의 후원자가 생기는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나 컴패션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컴패션은 일회성 이벤트나 단순한 구제활동이 아니라 영구적 변화와 열매를 맺는 생명 사랑 운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후원비 지급 차원을 넘어서 어린아이의 지적, 신체적, 정서적, 영적 성장을 체크하며 전인적으로 양육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오래전 우연한 기회에 컴패션에 가입하게 되어 소액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컴패션이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보내 준 책이 서정인 대표가 쓴 '고맙다'입니다. 그 책을 통해서 한국컴패션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우리 국민들은 시청 앞 광장에서 마음껏 외쳤습니다. "대한민국~!" 그런데 그곳은 50년 전 어린이들이 미군들에게 "기브 미!" 하고 외치던 곳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의 시신이 담긴 부대를 싣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를 뿌듯하게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제 1인당 GDP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손길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아이들이 북한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온정을 베푸는 행동이 이 지구를 살맛 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컴패션(Compassion)

1952년 한국전쟁 중 한국을 찾았던 미국 선교사 스완슨(Everett Swanson) 목사가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미국과 전 세계 후원국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먹이고 교육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훗날 ‘컴패션(Compassion)’으로 명명된 이 후원사업에 힘입어 1993년까지 40여 년 동안 국내 10만 명 이상의 불우 어린이들이 건실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003년 11월에는 세계 11번째로 한국컴패션이 출범해 현재 전 세계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필자소개

유능화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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