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 유지'라는 대만의 균형추 [허영섭]


'현상 유지'라는 대만의 균형추 [허영섭]

www.freecolumn.co.kr

'현상 유지'라는 대만의 균형추

2018.11.28

대만은 과연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끝내 중국에 흡수 통일되고 말 것인가. 지난 24일 실시된 지방선거를 통해 다시 제기된 질문이다. 반복되는 질문이건만 현실은 심각하다. 독립을 추구하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집권 민진당이 참패를 기록한 것이 그 결과다. 통합 성향의 야당인 국민당이 전국 22개 시장·현장 가운데 15자리를 차지한 반면 민진당은 6개 자리를 지키는 데 그쳤다. 국민들이 ‘독립’보다 ‘안정’을 택한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가 취임 2년 6개월이 지나가는 차이 총통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차이 총통의 재선 가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지 않아도 국정지지도가 이미 30%선에 턱걸이로 걸린 상황이다. 차이 총통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며 즉각 민진당 주석 자리에서 사퇴했고, 내각을 이끌어가는 라이칭더(賴淸德) 행정원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라이 행정원장의 사의는 거둬졌지만 차기 유력 총통 후보군에 포함된 그의 정치 생명에도 중대한 변수가 생긴 셈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결과가 국민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민진당의 일방적인 국정추진 과정에서 국민들의 불신과 피로감이 누적된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국민당으로서는 차이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국민당이 집권당 시절이던 2014년의 지방선거와 2016년 동시 실시된 대선·총선에서 연달아 참패를 기록했던 쓰라린 기억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민심의 방향이 완전히 돌아섰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뜻이다.

대만 유권자들이 민진당의 독립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고 해서 중국과의 통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미 양안 간 경제 교류가 진전됨으로써 기업인을 포함해 무려 200만 명에 이르는 대만 주민들이 대륙에 상시 체류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통일 움직임에 대해 여전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국민당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차이 총통의 과도한 독립 정책에 우려하는 민심의 소재가 드러났을 뿐이다. 무엇보다 탈(脫)중국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대만 사회가 받은 경제·외교적 손실이 작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과 독립을 놓고 따진다면 당연히 독립이 먼저일 것이다. 하지만 독립을 선언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분명한 데다 독립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중국과 마찰을 빚음으로써 양안관계가 불안해진다는 게 대만 국민들이 우려하는 대체적인 정서다. 중국으로부터 유커(遊客) 방문 중단이라는 보복을 당했고 수교국들이 연달아 떨어져 나가는 등 국제무대에서 급격한 입지 위축을 초래한 것이 차이 총통의 독립 노선과 무관할 리 없다. 중국의 노골적인 보복조치도 문제가 있지만 차이 총통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여론은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대만의 역대 정권이 통일과 독립 노선 사이를 오가며 정책 편차를 수정해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결국은 ‘현상 유지’라는 큰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차이 총통이 2016년 취임 이래 양안관계 정책 방향으로 현상 유지를 내세웠던 것도 이러한 민심의 동향을 반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과 거리를 둠으로써 극심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임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이 이른바 ‘3불 정책’을 앞세워 현상 유지를 추진했던 것과는 노선 차이가 분명하다.

대만 국민들이 급격한 독립 움직임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호 변경을 위한 국민투표가 부결된 데서도 확인된다. 이번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된 국민투표에 2020년 도쿄올림픽에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기존 명칭 대신 ‘타이완’이라는 명칭을 사용토록 하자는 안건이 부쳐졌으나 부결되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진당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탈원전 정책과 차이 총통의 개인적 의사가 반영된 ‘동성결혼 허용‘ 안건도 나란히 부결됨으로써 정책추진 동력이 급격히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전형정의(轉型正義)’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뤄지던 과거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 작업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만 국민들이 정치적인 문제보다 경제 활성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진당의 텃밭인 가오슝(高雄)에서 아무런 정치적 연고가 없는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가 앞세운 것은 “낡고 가난한 가오슝을 대만 최고의 부자 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이었고, 유권자들은 기꺼이 그를 선택했다. 이른바 ‘한류(한궈위) 열풍’의 비결은 이처럼 간단한 데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대만 국민들이 통일이냐, 독립이냐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 선거까지 이어진 지난 몇 차례의 선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대부분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현 상태에서나마 쪼들리지 않고 좀 더 여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경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제풀에 먼저 꺾일 수밖에 없다. 민심의 소재를 등한시한 채 이념에 치중한 당리당략을 놓고 다투는 정치인들에 대한 경종이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