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전쟁 상황이라면 [임종건]


이게 전쟁 상황이라면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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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쟁 상황이라면

2018.11.27

2018년 11월 24일 오전 11시쯤 한국통신(KT)으로 묶음 상태로 연결된 집안의 TV, 휴대폰, 유선전화, 컴퓨터가 한꺼번에 꺼졌습니다. 그로부터 자정 무렵까지 13시간 넘게 나는 바깥세상과 소통의 채널이 차단된 먹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완전 소통에는 최소 1주일 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큰 사고 같았습니다. 대형 해킹 사고이거나 사이버전쟁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긴급전화만 가능하다고 휴대폰에 안내문이 뜨기에 112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경찰의 대답에 우선 안도했습니다. 경찰은 통신사 전화선도 불통인 줄을 모르는 듯 통신사에 문의하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KT의 먹통은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단순 기계 고장으로 알고 코드를 점검했습니다. 동네에 그런 집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인근의 KT 대리점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KT 서울 아현 기지국 화재 소식은 거기서 들었습니다.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급한 연락을 하기 위해 행인에게 염치불고하고 SK전화기를 사용하는지를 물어 빌려 써야 했습니다. KT는 피해가입자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한 달치 통신료를 감해주겠다고 하나 통신장비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해서 쉽게 타결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인명피해의 크기로 중요도를 따지는 일반 화재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은 국가의 기반시설에서 발생한 화재라는 점에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심각한 사고입니다. 전쟁 상황이라면 이 시설은 적의 1차적인 공격목표가 될 것입니다.

기간통신시설이 파괴된다면 전쟁은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군사 장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군의 작전 수행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기간시설 파괴가 전략의 핵심인 이유입니다.

거기에 전력이나 상하수도 같은 기간설비의 파괴가 겹친다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전력이 차단될 경우 고층아파트는 거대한 공중화장실이 됩니다. 20~30층을 걸어서 오르내려야 하고, 냉장고의 음식물들은 쓰레기가 될 것이며, 화장실의 수세장치는 작동을 멈추게 될 터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강점은 북한보다 40배 이상 큰 경제력입니다. 우리는 그 경제력으로 각 부문에서 첨단의 기반시설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름으로 그런 시설의 보안을 철저히 한다고 했겠으나, 이번 사건이 보여주듯 관리에 허점은 여전합니다.

인프라의 확충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풍요와 편리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남북미 간에 진행되는 북한 비핵화 협상도 전쟁에선 파괴대상인 인프라를 평화적으로 공유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은 너무 편리한 나머지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사회가 됐습니다. 나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남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겸양을 모르는 자중지란의 사회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다행히 1개 통신사의 서울 일부 지역 가입자에게 국한됐습니다. 그리고 복구가 비교적 신속하게 이뤄졌습니다. 만약 전국에 영향을 미칠 KT의 시설에서 사고가 발생했거나, 다른 기간통신사인 SK통신마저 사고를 당했다면 국민의 분노는 민란 수준이었을 겁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편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오히려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했습니다. 소통이 만능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침잠(沈潛)의 시간을 생각게 한 사고였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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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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