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보내면서 [정숭호]

카테고리 없음|2018. 10. 31. 11:43


‘사전’을 보내면서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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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보내면서

2018.10.31

지난번 여기에 <‘사전’을 만들면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원로 소설가 김원우 씨의 2017년 작 ‘운미 회상록’을 읽는데,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서 사전 찾아가며 읽었다. 우리말에 좋은 뜻을 가진 말보다 나쁜 뜻을 가진 게 더 많은 것 같더라. 소설의 시대 배경이 나라가 최악으로 어수선하고 어지럽던 때여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우리 눈앞의 혼란상도 그때 못지않다. ….” 이런 내용에다가 소설에 나오는 모르는 단어와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내 표로 만들어 곁들인 글인데, 써놓고는 후회를 좀 했습니다.

내용에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글 말미에 부록처럼 써 붙인 “제가 이런 단어들을 모아 사전을 만들었는데, 필요하신 분 연락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는 글귀 때문입니다. 생각 밖으로 많은 분들이 이메일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사전’을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거의가 저와 모르는 사이인데도 “그 힘든 일을 하셨다니 감동입니다. 존경스럽습니다”라고, 매우 곡진하고 감동적인 말씀으로 주문서 첫 줄을 시작하셨더라고요.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모르는 우리말, 처음 본 한자어, 재미난 속담 따위 300여 개를 모아서 정리한 표일 뿐인데, 독자 눈길 좀 끌어보려고 ‘사전을 만들었네, 필요하시면 드리겠네’라고 ‘뻥’을 친 결과가 평생 못 받아본 대접을 받게 된 겁니다. 그러니 미안하고 죄송한 생각이 안 들 리 없지요. 정말 ‘사전’ 혹은 ‘사전 비슷한 것’인 줄로 알고 보내달라고 하신 분들, 이거 받으면 실망이 아니라 분노까지 일으킬 텐데 …, 후회에 걱정까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거 절대 사전 아닙니다. 항목 300개쯤 되는 단어집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메일을 쓰고는 ‘사전’을 첨부해 보냈습니다.

몇몇 분이 “잘 받았다. 읽고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기대 안 한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걱정했던 것처럼 “실망했다. 이게 무슨 사전이냐. 기자들 과장 심한 거 알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같은 반응을 보내신 분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밉지 않아서가 아니라 혼낼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러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합니다.

이번에 ‘사전’을 보내드리면서, 우리말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 생각 밖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외래어는 물론 ‘신조어’라는 고상한 명칭을 덮어쓴 유행어의 범람을 걱정하시는 분도 있었고, 제 ‘사전’이 더 예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또 우리말 단어집-제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사전 비슷할 것이 분명한-을 만들고 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달래기 위해 모르는 말을 찾아 표로 만들어 본 것뿐인데, 이분들은 글로써 말로써 더 맑고 밝은 세상을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거칠지 않고 속되지 않은 말과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쓰도록 해서 오가는 말의 격을 높이면 우리 삶도 덜 거칠고 덜 속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들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요즘 우리 주변에는 남의 속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뒤집어 놓나, 어떻게 하면 내가 너를 경멸할 뿐 아니라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음을 더 잘 알도록 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그런 뜻을 담은 말을 내가 너보다 더 잘, 더 먼저, 더 많이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지 않습니까. 남을 욕하고 싶어도 참고 있거나, 욕을 하는 대신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요. 세상이 이러니 바른 말, 깨끗한 말, 맑고 밝은 말, 좋은 말,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재치 있는 말이 더욱 아쉬워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과 글을 아쉬워하는 분들이 제 어쭙잖은 ‘사전’도 필요하다 하신 거라 생각합니다.

10월 22일자 한 신문에 어떤 재벌 회장이 학술재단에 520억 원을 출연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다른 재벌이 세운 장학재단이 출판문화대상을 신설하고 매년 2억5000만 원을 상금으로 준다는 기사도 같은 날 같은 신문에 났습니다. 혹시 이와 비슷한 문화 사업을 생각하는 재벌이 있다면 ‘바른 말, 옳은 말, 예쁜 말 쓰기 운동’을 시작해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 쓰기 대상’도 만들면 좋겠지요. 

증오와 혐오, 경멸을 담은 말을 가장 많이 생산해 유통시키는 정치인들과 시민단체, 어린이와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쓰는 유행어를 쉴 틈 없이 만들어내는 피디와 연예인과 방송작가 등 소위 방송인들이 잘못을 뉘우치도록 바른 말 옳은 말을 쓰는 사람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상금을 주자는 겁니다. (우리말과 외국어를 섞은 요상한 단어, 한글 자모와 알파벳을 뒤섞어 새로운 글자 따위를 경쟁적으로 ‘발명’해 화면에 그대로 내보내는 사람도 이들입니다!)

또 이들이 만들어 낸 품격 없는 ‘신조어’가 세태를 반영한다며 그대로 옮겨 쓰는 기자들, 공문서는 물론 길가의 플래카드나 현수막에까지 한자어와 외래어를 나열하기 좋아하는 공무원들에게도 이 상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의 천박한 말버릇 글 버릇도 돈으로 고치자는 저의 제안이 엉뚱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천박한 말 대신 바른 말과 옳은 말 그리고 예의 바른 말 쓰는 사회를 만드는 게 학술연구나 출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정부 공무원들이 이런 운동 시작했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것 같아서 그 전에 재벌이라도 이 일을 해줬으면 하고 이 글을 씁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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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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