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몬트 백작의 죽음 VIDEO: Count Egmont before his Death


The Elbphilharmonie Hamburg

Lamoral, Count of Egmont


  올해 초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초현대식 콘서트홀의 개관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The Elbphilharmonie Hamburg source N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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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을 유리로 뒤덮은 이 모던한 콘서트홀의 이름은 ‘엘프 필하모니홀’. 들어간 비용이 애초 예상했던 범위의 10배가 넘고, 화려한 내·외관에 비해 사운드가 썩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열리는 모든 콘서트가 연일 매진사례를 이루며 ‘새집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기도 하다. 


엘프 필하모니홀의 상주 오케스트라는 북독일방송교향악단, 즉 엔데아르(NDR)이다. 아예 새 집 장만의 기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명칭도 ‘NDR 엘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로 확대 개칭했다. 그들이 개관 기념콘서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에그몬트’를 연주했다. 여기서 ‘에그몬트’란 베토벤의 유명한 ‘에그몬트 서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의 창작 근거가 되었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역사비극 <에그몬트 Egmont>를 뜻한다.


공연에서 나레이션을 맡은 건 오스트리아 출신의 명배우 마리아 클라우스 브란다우어. 연극배우로 유명한 그는 수년 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더만>의 주역이었고, 우리에게는 아마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미 노령이지만 특유의 형형한 눈빛과 뛰어난 연극적 발성이 괴테의 계몽적 근대 비극을 21세기에도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아래는 그날 공연의 전체 실황이다. 



극 중의 에그몬트 백작(1522-1568)은 실존 인물이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치하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맞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주창하며 싸운 인물이다. 당시 가장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맞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일대에서는 신교 운동이 정치적 독립운동과 결합되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스페인 군의 총사령관이 그 유명한 ‘피의 공작’ 알바이다. 그는 무시무시한 초토화 작전으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등 저지대 국가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 했고, 결국 에그몬트 백작을 비롯한 수많은 우국 지사들을 감금, 투옥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다.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의 죽음 Last Respects to the Remains of Counts Egmont and Hoorn source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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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후일 수많은 예술작품을 낳았다. ‘질풍노도 문학’의 두 기수 괴테와 쉴러가 모두 이에 관한 희곡을 썼다. 괴테는 앞서 말한 <에그몬트>를 통해 백작의 시민주의적, 계몽적, 영웅적 저항을 그렸다. 쉴러는 포커스를 압제자인 스페인의 왕실로 옮겨 놓는다. 펠리페 2세와 아들 돈 카를로스간의 갈등을 다룬 비극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가 그것이다. 여기서 쉴러는 단 한 명의 가상인물인 로드리고 후작을 통해 자신의 주제의식 – 인류의 해방과 계몽에의 희망을 설파하고 있다. 쉴러의 희곡은 후일 베르디의 장엄한 오페라로 재탄생되어 지금도 그 음악세계의 가장 완벽한 기념비로 남아 있다.


(쉴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기억과 마음에 남아 있는 ‘에그몬트’는 베토벤이 남긴 서곡이다. 10여분 남짓의 길지 않은 곡이지만 베토벤 예술의 위대함과 심오함이 그 속에 빼곡히 담겨 있다. 불굴의 의지, 숭고한 인간적 가치에의 갈구. 완벽한 음악적 골조와 그를 대담하게 관통하는 격렬하고도 공격적인 관현악의 꿈틀거리는 폭발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 우리에게도 마치 ‘오늘의 이야기’처럼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위대한 예술의 감동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쿠르트 마주어 지휘,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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