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의 대면(對面): 안네 프랑크와 윤동주 [정달호]

카테고리 없음|2017. 9. 1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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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의 대면(對面): 안네 프랑크와 윤동주

2017.09.11

안네 프랑크(1929.6.12.~1945.2, 3월 중 추정, 날짜 미상)는 13~15세 때 나치의 추적을 피해 암스테르담 운하 부근의 아버지 회사 건물 내 비밀의 방(Achterhuis, Annex)에 숨어 지낼 때 쓴 일기로 세상에 알려졌고 윤동주(1917.12.30.~1945.2.16.)는일제 치하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별처럼 빛나는 시어(詩語)로 빚어낸 저항시(詩)로유명합니다. 안네 프랑크는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본인의 희망대로 훌륭한 작가나 저널리스트가 되었을 수도 있는 문학소녀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비극적 종말을 맞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더 있을 듯해 보이지 않습니까?지난 7월13일~14일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된 제 7회 역사 NGO 세계대회(2017 International NGO Conference on History and Peace)가 아니었더라면 그걸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역사 NGO 포럼’과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이 회의는 우리 삶에서 기억과 기록, 그리고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 부속 행사로 ‘안네 프랑크와 윤동주의 만남’이란 제목 하에 이 두 사람의 생애에 관한 사진과 기록이 나란히 전시된 사진전이 있었습니다.얼핏 보면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을 묶어서 전시한다는 게 금방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로 돌아가 살펴보면 둘 사이의 공통점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2년 간 은신처에서 지내던 중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서 온갖 인권유린을 당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안네 프랑크나, 일제의 압박 하에서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시를 쓰다가 잡혀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생을 마친 윤동주나, 자유를 속박당한 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공통된 운명을 겪은 것입니다(두 사람의 출생 시기는 달라도 타계한 시기는 거의 일치). 그 특별한 전시는 우리나라 청소년 역사단체인 ‘우.리.야 영 글로벌리스트’(Universal Reinforcement and Innovation of Youth Association Young Globalist)가 안네 프랑크 하우스의 협조를 받아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역사의식과 창의적인 발상이 가상합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은신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주도하여 1957년~1960년 기간에 설립한 안네 프랑크 기념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연평균 130만 명이 방문할 만큼 암스테르담의 명소가 된 지 오래입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안네의 가족을 중심으로 일행 8명이 은거하던 바로 그 건물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데 방문객들이 줄을 서서 3시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안네의 일기 원본, 안네와 그 가족들의 유품, 안네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 장소를 다녀옴으로써 방문객들은 당시의 역사와 대면하고 현재를 성찰하게 된다고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나설 것입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나치 하에서 자행된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인류가 증오와 차별을 극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교육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비전을 공유하면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안네 프랑크 센터)와 베를린(안네 프랑크 교육 센터), 그리고 미국 뉴욕(안네 프랑크 상호존중 센터) 등 세계 각지에 안네 프랑크의 이름을 내건 역사교육 기관들이 설립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관들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와의 협력 하에 ‘역사와의 대면’을 자국 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전파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인 독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안네 프랑크의 정신을 살려 나가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런 역사교육 기관들의 활동에서 ‘안네의 일기’가 그 중심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세계 70여 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되었을 만큼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15세의 어린 소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일기는 나치의 인권유린과 전쟁의 비참함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1952년 미국에서 나온 안네의 일기 영어판 서문에서 엘레노아 루즈벨트 여사는 안네의 일기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전쟁과, 인간에 대한 전쟁의 영향에 대한 논평 중 가장 지혜롭고 감동적인 것 중 하나” 라고 했습니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 만델라 대통령, 하벨 대통령 등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연설이나 회고록에서 안네의 일기를 언급하면서 하나같이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공의 감옥에서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었다고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번에 안네의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꿈 많은 어린 소녀지만 어른 못지않은 분별력과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네가 일기를 시작하면서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견딘다” 는 구절을 원용했는데 그것은 그의 작가적 인식과 지향을 확고히 보여주는 명구(名句)라 하겠습니다. 그의 차분하고 성실한 기록에서 역사를 대하는 순수하고 용기 있는 영혼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역사NGO 세계대회에서 저에게 또 하나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온 인권 전문가의 특별 강연이었습니다. 제가 그 강연 세션의 진행을 맡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강연자인 마야 나네도비치(Maja Nanedovic)라는 크로아티아 출신 정치학 박사는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에 휘말리기 전인 9세 때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고 너무나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자신도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0세 되던 해에 전쟁이 터져 어린 나이로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난민 생활을 해온 40대의 여성입니다. 그는 독일에서 인권 문제를 전공한 후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역사교육 담당자로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역사와의 대면’을 주제로 세계 각국을 다니며 안네의 일기와 안네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교육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안네의 예를 들면서 어리지만 당당하게 시대의 아픔 기록하였다고 하면서 소녀 안네가 남긴 교훈을, 1)역사를 기억하고(Remember), 2)역사에 대해 성찰하고(Reflect), 3)역사에 대응하는(Respond)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역사를 대면하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나네도비치 박사는 또한 누구나 악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그 실행자일 수 있고, 누구나 시대의 영웅이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방관자가 될 수도 있듯이, 한 개인이 스스로 선과 악이라는 상반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에 개개인 스스로가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잘못된 역사를 하나의 악령으로 볼 때, 그 역사와 대면하면 악령이 사라지지만 이를 피하려고 하면 도리어 악령이 더 머문다고 설명합니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가 기념사업을 도맡아 하면서 윤동주가 생활하던 기숙사 건물 전체를 윤동주 기념관으로 확대 조성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뒤늦은 감이 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의 병으로 생을 마감한 윤동주의 죽음이 바로 우리가 대면해야 할 생생한 역사입니다. 그는 쿄토의 동지사대학교 유학 중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체포, 수감되어 모진 고초를 겪다가 해방 직전인 1945년 2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의 생체실험 주사를 맞아서 결정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전후 일본 측의 관련 자료 폐기 등으로 이를 끝까지 추궁할 수 없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도 윤동주 기념관을 안네 프랑크 하우스 같은 역사교육의 장소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기 위한 것보다는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고 이를 대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은 피해자인 우리보다도 가해자인 일본이 그들의 그릇된 역사를 대면하고 후세를 위한 역사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독일이 안네 프랑크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별도의 교육기관들을 설립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는 것처럼 일본도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압박과 유린의 역사를 똑바로 대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이 독일의 예를 배우고 따른다면 윤동주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후쿠오카 형무소를 비롯한 일본 내 여러 연고지에 식민지 통치 중 자행한 온갖 비인도적 만행을 반성하는 역사관을 짓는 게 마땅히 할 일입니다. 

현실을 보면 일본은 이런 역사와의 대면을 피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반성은커녕 도리어 과거를 미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일 관계가 계속 꼬이는 것은 전후 일본이 자라나는 세대에 대해 진정성 있는 역사교육을 소홀히 한 데에도 그 연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일은 국가의 정책이나 국가 간의 외교적 거래에만 맡겨 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공동으로 역사교육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럽역사교육자연합(Association of European History Educators, EUROCLIO)이 본받을 만한 예로 보입니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국가 간의 해묵은 역사 갈등을 해소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역사 NGO 포럼’과 같은 민간단체들이 각국에서 꾸준한 활동을 통해 한일 간의 갈등을 비롯한 아시아의 역사 갈등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 주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시민 개개인이 미래 세대의 평화를 위해 역사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역사NGO 세계대회: 역사와 평화에 관한 세계 시민단체들의 회의로서 2007년부터 격년으로 한국에서 열리며 세계대회가 없는 해에는 해외 특정 국가를 택해 그 나라 역사 NGO들과 공동으로 지역 의제에 관한 ‘역사NGO 활동가 대회’가 열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역사 NGO 포럼: 국내외 시민단체들이 제휴와 협업을 통해 역사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동의 의제를 개발하고 실천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2009년 창립된 국내 역사 관련 시민사회 연대

*제 7차 세계대회 참가 주요 해외단체: 유럽역사교육자연합(EUROCLIO), 평화의 가교(일본), 난징대평화연구소(중국), 안네프랑크의 집(Anne Frank Huis, 네덜란드), 동아시아갈등연구네트워크(아세안)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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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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