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제5절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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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제5절

2017.07.12

올해에는 예년과 달리 ‘봄날은 간다’를 별로 불러보지 못한 채 어느새 여름을 맞았습니다. 술자리가 줄어들었든지, 술자리는 전과 같은데 노래 부르는 자리가 줄었든지 둘 중 하나였겠지요. 이 노래에 대한 흥이 없어지거나 줄어든 건 결코 아니니까요. 

누구나 인정하듯 ‘봄날은 간다’는 우리 가요의 최고봉입니다. 특히 가사의 절절한 매력과 호소력이 일품입니다. 2004년 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뽑힌 바 있습니다. 시인들만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봄날은 간다’를 ‘내 인생의 노래’로 꼽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연극과 영화로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여럿 나왔습니다. 

손로원(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의 노래로 1954년 첫선을 보인 이래 한국인들은 봄이 되면 이 노래를 어김없이 불러냈고, 봄을 보내면서 이 노래로 가락을 맞추었고, 다시 봄이 오기를 바라면서 이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백설희에서 시작해 내로라하는 가수들 모두 ‘봄날은 간다’를 불렀습니다. 가수 30여 명의 노래를 한 장에 담은 CD도 있습니다. 당연히 맛이 각각 다른데, 나는 한영애가 부른 ‘봄날은 간다’를 가장 좋아합니다.  

‘봄날은 간다’는 3절로 된 노래이지만, 녹음 시간이 맞지 않아 초판에는 제1절과 제3절만 수록됐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게 1절입니다. 제3절은 이렇습니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제2절은 백설희가 다시 녹음한 재판에 수록됐습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그런데 2015년 4월, 문인수 시인이 신작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를 내면서 제4절을 발표했습니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원작사자 손로원은 6·25 때 피란살이하던 부산 용두산 판잣집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두고 있었는데 화재로 사진은 불타 버리고, 연분홍 치마 흰 저고리의 수줍게 웃던 어머니는 노랫말 속에 남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 여성을 그리는 노래이던 ‘봄날은 간다’는 문인수에 의해 시인 자신을 포함한 노인들의 노래로 의미가 커졌습니다. 그는 70대 중후반인 세 누님과 이 노래를 하다가 4절을 쓰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 4절을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달쯤 전에 서예 스승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선생님이 이 노래의 후속 가사를 써보라고 권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봄날은 간다’를 소재로 이미 글을 두 편 썼습니다.(http://blog.naver.com/fusedtree/70137369134 
http://blog.naver.com/fusedtree/220405690387)  그러니 당연히 가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 말씀을 듣고부터 꼭 해야만 하는 큰 숙제를 받아든 것처럼 부담감과 의무감 속에서 가사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봄날은 간다’는 가사가 정교하게 짜인 노래입니다. 1~3절은 물론 문인수 시인의 4절에도 각 절에 맞는 사물과 색깔, 삶의 길과 인간관계의 모습이 고루 잘 배치돼 있습니다. ‘벌써 이렇게 모든 걸 다 이야기했는데 뭘 추가할 수 있을까? 유명인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가사를 덧붙인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리한 생각은 이미 1~3절과 4절에서 이산과 별리, 노쇠와 소멸을 이야기했으니 더 이상 이런 상실과 비탄의 정서에 기대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차라리 재회와 부활, 소생을 이야기하자, 봄날은 가고 사람은 사라지지만 그 봄날은 어김없이 다시 오고 그 봄날을 노래할 사람들도 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과 고심 끝에 내가 지은 제5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두운 이 밤이 지나가면/푸르른 새벽/오늘도 그 모습 그리면서/이별에 겨워 우는 주마등 길에/별이 뜨듯 다시 만나 꽃이 피듯 함께하자/살뜰한 그 다짐에 봄날은 간다.” 

1절에 나오는 반어적 의미의 ‘알뜰한 그 맹세’를 ‘살뜰한 그 다짐’으로 받았습니다. 알뜰과 살뜰은 의미가 비슷한 말이어서 시작과 끝에 배치하면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1절의 꽃은 별과 꽃으로 바꿔보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함께하자’는 반드시 붙여 써야 합니다. 1~4절과 함께 정리한 가사의 중요한 단어는 다음 표와 같습니다.      

재회와 부활로 제5절의 개념을 설정한 것은 이로써 ‘봄날은 간다’ 가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그러니까 내가 쓴 가사가 완결판이 되어 더 이상 남들이 덧붙이지 못하기를 바라는 이기적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나는 어쨌든 큰 숙제를 한 기분입니다. 올해 봄에는 이렇게 ‘봄날은 간다’를 생각하며 봄날을 보냈습니다. 봄날은 가지만 봄날은 다시 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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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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