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일행의 제주도 표착지(漂着地) 논란 [정달호]


www.freecolumn.co.kr

하멜 일행의 제주도 표착지(漂着地) 논란

2017.03.29

서가(書架) 정리를 하다가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강준식, 1995년)가 눈에 띄어 훑어보던 중 시선을 끄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당시 하멜(Hendrik Hamel, 1630~1692) 일행이 제주도 해안에 표착한 지점에 관한 것인데 저자는 1653 년 여름 하멜 일행의 선박이 난파한 후 선원들의 표착지점이 현재 하멜 기념비가 서 있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의 용머리 해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남쪽인 강정 해변으로 추정한다는 것입니다. 강정은 해군기지 문제로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곳으로, 제가 사는 집 뒷산의 정상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1653년 8월 16일 제주도 서남쪽 해안에 난파한 하멜 일행이 우리나라에 처음 발을 디딘 지점이 바로 인근일지도 모른다니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가 내세운 근거는 하멜표류기(이하 ‘표류기’로 부름)상 하멜 일행이 최초로 표착한 지점에서 대정읍(모슬포)까지 걸어간 도보 거리입니다. 표류기에 의하면 정오를 지나, 그간 머물던 해안가를 출발하여 4밀렌(mijlen)을 걸어서 저녁 전에 대정읍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4밀렌, 즉 4마일을 독일식 마일(1밀렌=7.4킬로미터)로 계산하면 약 30킬로미터가 된다고 합니다. 보통 걸음으로 시간당 4~5킬로미터를 걷는다고 할 때 표착지에서 대정읍까지 오후 반나절의 시간이 걸렸다면 현재 하멜 기념비가 서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이동해 왔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지금 기념비가 서 있는 곳에서 대정(모슬포)까지는 7~8킬로미터밖에 안 되는데, 이 정도 거리는 두어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기념비를 세울 당시에 밀렌을 통상의 방식대로 영국식 마일(1마일=1.6킬로미터)로 계산함으로써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저자(필자와는 대학 동문임)의 추정이 타당한지는 차치하고라도 지금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위치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추후의 논란을 촉발한 점은 평가할 만합니다. 

문제의 하멜 기념비는 안덕면 용머리 해안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삼방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80년에 ‘한국국제문화협회’라는 단체와 네덜란드의 ‘역사문화재단’이 제주도(濟州道)를 비롯한 양국 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그 자리에 세운 기념비에는 아래와 같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박 더 스페르베르호가 표류하여 헨드릭 하멜이 이곳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653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뒤 13년 동안 그는 이 땅에 머물었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책을 펴내 한국을 서양 세계에 널리 밝힌 최초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 옛일을 기념하여 여기 이 작은 돌을 세운다.” 그런데 기념비를 세울 당시에 하멜 일행의 표착 지점을 용머리 해안으로 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기념비의 우리 측 설립자인 ‘한국국제문화협회’라는 곳을 찾아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이 단체는 현재 존재하지도 않아 당시의 기록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003년 서귀포시는 기념비에서 멀지 않은 해안가에 하멜이 타고 온 배 모양을 본뜬 하멜 기념관까지 만들었습니다. 당시 같은 화란인으로 2002년 월드컵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 팀을 이끈 히딩크의 인기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 멋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기념비와 기념관 공히 그곳을 하멜 일행의 최초 표착지로 안내하고 있으니 만일 이곳이 사실상의 표착지가 아니라면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도 하고 자료를 검색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은 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실은 오래전부터 하멜의 표착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으며 중앙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했지만 지방지에는 여러 차례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새롭게 논란이 된 계기는 1997년에 한글로 번역 출간된 지영록(知瀛錄)의 하멜 관련 기술이었습니다. 지영록은 제주 목사(牧使)를 지낸 이익태(李益泰, 1633~1704)가 재임기간(1694~1696) 중 본인이 관할한 업무, 제주에 관한 역사, 그리고 제주를 떠날 때까지의 행적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문집으로 권말 외국인 표류 부분에서 하멜의 표착지를 적시(摘示)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멜 일행 “64명이 함께 탄 배가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져, 빠져 죽은 자가 26명, 병자가 2명, 생존자가 36명이다.” 라고 썼습니다. 이에 따르면 하멜 일행의 표착지는 ‘대야수 연변(大冶水 沿邊)’인 것입니다. 전기한 강준식의 저서는 지영록이 번역 출간되기 전에 나왔기에 이런 역사적인 기록을 인지하지 못한 채 표착지점을 강정 해변으로 잘못 추정한 것이지만 정말 큰 문제는 당국이 하멜 일행의 표착지를 바로잡으려는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영록의 기술이 알려진 이후 ‘대야수 연변’이 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변이라고 보는 신도리 주민들과 관련단체가 당국에 이를 시정해줄 것을 요청해오고 있으나 당국은 사실관계의 고증이 부족하고 네덜란드 측과의 협의도 필요한 사안이라고 하면서 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보도에 의하면 2003년 10월에 있었던 하멜 표착지 관련 전문가 세미나에서는 지영록에 명시된 ‘대야수 연변’이 지금의 지도상으로는 대정읍 신도리에서 고산한장에 이르는 해변임이 문헌과 현장답사를 통해 밝혀졌다고 합니다(제민일보 2003. 10.15). 이 정도면 표착지에 관한 역사적, 지리적 고증(考證)은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국이 고증 부족 운운하면서 명백한 오류를 그대로 놔두는 것은 관광객 오도(誤導)를 넘어 결국에는 대한민국의 품격에 손상을 가할 것으로 우려됩니다. 2014년 제주도의회에서 하멜 표착지 규명에 관한 공청회도 가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바뀐 것은 없습니다. 제주도와 서귀포시 당국은 합당한 절차를 통해 하루빨리 하멜 일행의 표착지를 바로잡음으로써 국민과 세계인이 역사적 사실을 올바로 알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편, 이익태 목사가 지영록을 써서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멜 일행의 표착지를 영원히 밝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이 절로 일어납니다. 비록 2년이지만 재임기간 중 제주 각지를 답사하고 제주에 관해 자세히 기록할 뿐 아니라 하멜 일행의 표류를 포함한 외국인의 제주 표도(漂到)에 관한 기록을 각자에 대한 심문 내용까지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관리로서 매우 높은 수준의 직무윤리를 지녔던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의 옛 명칭이 영주(瀛州)이므로 지영록은 요즘 식으로는 ‘제주 바로 알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제주의 역사에 대한 문헌과 사적(史籍)이 자세하지 않고, 또 이 기록을 통해 제주의 누적된 폐단이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영(知瀛)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고 편찬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권세와 수탈에 눈이 멀었던 조선의 사대부 관료사회에 이런 분이 더 많았더라면 우리 역사는 더 떳떳하였을 것이며 나아가 씻을 수 없는 국권의 상실이라는 참담한 일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울러 그런 분이 현 시대의 도백(道伯)이라면 하멜 일행의 표착지에 관한 잘못된 현상에 대해 진작에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하멜표류기의 원 제목 : ‘1653년 8월 16일 퀠파트(Quelpart) 섬에서 실종된 이래 승무원 8명이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한 1666년 9월 14일까지스페르베르(Sperwer)호의 생존자인 장교 및 선원들이 코레아 왕국에서 겪었던 일과 그 나라 민족의 풍습 및 그 나라에 대한 일지’

**하멜 표착지 바로잡기 관련 단체는 매년 8월 16일 신도 2리 해변(사진 참조)에서 하멜 일행에 대한 헌다식(獻茶式)을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