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D단조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VIDEO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 


   어쨌거나 우리는 저녁의 콘서트홀에서 요제프 하이든의 음악을 만나기 쉽지 않다. 그건 정말이지 힘들다. 오늘 저녁 하이든의 94번 교향곡을 듣고, 내일 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요즘에 이르러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나 친근하게 생각되는 작곡가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현대음악만큼이나 먼 거리에 떨어져있는 존재가 되었다. 


비엔나 모자르트 박물관 출처 MonkBoughtL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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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차르트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21세기인 지금 현재에도 세상 모든 곳에서 모차르트가 울려 퍼지고 있다.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두 작곡가이고, 심지어 하이든이 더 오래 살았다. 교과서에 실리는 빈도도 비슷하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지금도 연주되고, 청취되고, 들린다. 그러나 하이든은 가끔, 그것도 밤의 교향악이 아닌 아침 11시 콘서트의 메뉴 정도로만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하이든은 단조 음악이 없다. 그의 음악은 ‘단조라도 장조다’. 반평생 귀족 고용주 밑에서 충실하게 음악을 쓰다 보니, 듣기 좋은 음악을 써야한다는 생각 내지 강박이 내면화된 듯 싶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화사하고 정교하며, 단정하고 균형감이 넘친다. 대신 인생사의 고민이나 짙은 연민, 인간적인 애수 등을 담고 있지는 않다. 아니, 일부러 담지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달랐다. 그는 귀족 밑에서 봉사하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 삶은 자유로웠지만 늘상 불안하고 처절했다. 모차르트에게 음악은 천상의 세계를 노래하는 예술 언어임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투쟁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기어이 단조 음악을 썼다. 모차르트의 단조는 삶에 대한 자조일 수도, 세상에 대한 원망일수도, 아니면 억지스런 밝음을 강요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하나의 저항일 수도 있다. <피아노협주곡 제20번>에서 그는 기어이 어두운 단조 음악으로 다시 한번 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0번> 2악장, 피아노 프리드리히 굴다, 뮌헨 필하모닉)


당장에 ‘파격’이라는 평가가 붙는다. 귀족들은 그의 단조 음악을 싫어했고 또 두려워 했다. 귀와 마음을 동시에 울리는 어두운 정조의 음악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그 시대의 지배계급들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20번은 모차르트가 쓴 ‘최초의 단조’ 피아노협주곡이다. 애초에 귀족들의 오전 살롱에서 연주될 음악도 아니었다. 살기 위한 수단으로, 빈의 어느 카지노 식당을 위해 쓴 곡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치밀하게 골조된 음악은 고전파 협주곡의 기념비적 균형미를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 단정한 형식 속에 채워진 내면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절망과 고통, 기쁨과 좌절의 숨가쁜 교차일 뿐이다. 가장 고결한 창작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때, 역설적으로 모차르트의 삶은 가장 두렵고 곤궁한 처지에 있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0번> 전곡, 피아노 예프게니 키신, 크레메라타 발티카)


그래서 때로 예술은 잔인하다. 창작자의 고통과 슬픔, 우울을 자양분 삼아 또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베토벤의 시대를 예언이라도 하듯,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그 정념과 슬픔의 고백록이 건반을 타고 찬란하게 흩어진다. 모차르트가 남긴 최고의 피아노 음악이다. 우리는 그의 ‘D단조’에서 좀처럼 헤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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