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유배지에서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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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유배지에서

2017.03.22

강화도 나들길을 걸으면서 부딪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이토록 순박한 섬이 지난 역사에서 유배지로 이용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배의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도 주로 권력다툼에서 쫓겨난 임금과 왕족이 대상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나 송강 정철처럼 중책을 맡은 벼슬아치들이 권력에 밉보이는 경우에도 멀리 변방이나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곤 헸지만 강화도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유배지 중에서도 등급이 높았다는 뜻일까요.

‘강화 도령’이라고 불리는 철종만 해도 사도세자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족이었습니다. 집안이 모반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이곳에 유배되어 농사를 짓다가 엉겁결에 임금 자리에 오른 경우입니다.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용흥궁(龍興宮)이 그가 열아홉 살에 궁궐로 들어가기까지 다섯 해 동안 머물렀던 거처입니다. 그의 외척이 살았던 ‘철종 외가’도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선원면에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강화도 옆에 위치한 교동도에 유배됐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배 여드레 만에 사약을 받아 서른여섯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내놓게 됩니다. 둘째 형 수양대군이 단종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면서 동생에 대해서도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씌운 것이지요. 이밖에 고려 희종 임금도 무신정권의 중심인물인 최충헌 일파에 밀려 영종도를 거쳐 교동도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강화도나 교동도가 이처럼 유배지로 떠올랐던 것은 과거 왕조의 도읍이던 한양이나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감시하기 쉬운 데다 섬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도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섬 전체가 유형생활을 치르는 감옥이었던 셈입니다. ‘절도안치(絶島安置)’라는 형벌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다로 사방이 가로막힌 섬에서 외롭게 지내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형벌이라 하겠습니다.

조선 임금 가운데 희대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이 유배된 곳도 교동도였습니다.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망 배경과 관련한 앙심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고 다시 갑자사화까지 일으켜 궁중을 핏자국으로 물들인 주인공이었습니다. 유생들을 쫓아낸 성균관에서 술판으로 기생들과 놀아났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틀어막기 위해 사간원과 홍문관을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패악 끝에 중종반정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연산군이 유배되어 머물렀던 거처는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일반 민가와는 약간 떨어진 위치로, 지금은 그 자리에 볏짚으로 지붕을 올린 네 칸짜리 황토집이 구경거리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조차도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 바깥출입을 금지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을 받았다니, 하루아침에 중죄인으로 전락한 참담한 심정을 떠올리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소가 끄는 평교자에 태워져 여기로 호송되기까지 길거리에서 백성들의 갖은 조롱도 쏟아졌겠지요.

현재 교동도에는 연산군의 자취가 이곳 말고도 두 군데나 더 전해집니다. 강화도 방면으로 교동대교를 건너가기에 앞서 도로 바로 왼쪽에 위치한 신골 동네가 그 하나입니다. 연산군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며 집터도 남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화개산 반대쪽인 교동읍성 바닷가 언덕의 부근당(扶芹堂)에도 연산군 화상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근당 앞에 세워져 있는 설명문에 따르면 연산군의 원혼을 달래려고 마을 주민들이 얼마 전까지도 격년으로 당굿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처녀들이 등불을 치켜 들도록 하는 처녀봉공 등명(燈明) 의식이 따랐다고 하지요. 사실은, 화개산 북쪽 기슭 지금의 유배처에도 비슷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는 길목에 커다란 느티나무를 볼 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나무에 제사를 드려 원혼을 달랬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이곳 유배지에서 역질을 앓다가 서른한 살 나이에 마지막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아마도 화병이었겠지요. 죽고 나서 근처에 묻혔으나 그 뒤 부인 신(愼) 씨의 간청으로 경기도 양주로 이장되었습니다. 지금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묘소입니다. 묘소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표석 이외에 아무런 장식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폐위된 신분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이제 교동도 화개산에는 봄기운이 한창입니다. 머지 않아 진달래와 개나리가 무리지어 피어나 산기슭을 온통 빨갛고 노랗게 물들일 것입니다. 뻐꾸기, 소쩍새도 골짜기마다 우짖겠지요. 연산군의 넋이 아직도 이 골짜기를 배회하고 있다면 지금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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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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