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어로 '담배 있나요?' 물었던 내가 만난 비운의 황태자 김정남"


이신욱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모스크바 대학교 정치학 박사


    며칠 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른 아침 암살사건이 있었다. 공항 밖으로 달아나는 두 명의 젊은 여인 그리고 쓰러진 중년의 신사는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쓰러진 중년신사의 여권에는 김철(Kim chol)이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김정남을 처음 본 것은 1999년 가을로 기억한다. 모스크바 부촌 바빌로바 거리 85번지…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러가는 길에 고려인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필자를 본 고려인 청년은 유창한 노어로 담배를 요구하며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고려인 청년은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것과 자기는 멀리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정말 순박한 시골총각 같은 고려인 친구가 마음이 비단결이라는 생각에 "효자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순박한 고려인 청년에게 호감이 생겨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평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김정남이며 어머니를 보러 모스크바에 종종 들른다는 것이다.


사실 김정남이 누구인지는 몰랐고 평양에서 온 것으로 보아 상당히 높은 고위층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시 북한유학생은 1993년 ‘유학생 귀순사건'이후 전혀 없었고 대사관 직원만이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었다.) 필자가 한국말을 시작하자 김정남은 깜짝 놀라며 북한말투로 고려사람 아닌가요? 라고 했음을 기억한다. 서로 고려인으로 알았으니 노어로 대화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김정남의 성격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포악하고 권력지향적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는 전혀 달랐다. 도박과 술, 여자를 좋아해서 북한판 오렌지족(놀세족)이라는 소문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으나 인간 김정남의 일부분으로 생각된다. 인간 김정남은 순수해보였고 필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솔직했으며 어머니에 대해 효심이 매우 깊어보였다.


필자가 가정교사를 하던 집 거실에서 흰 저고리 검정치마 복장의 여성 경호원 7~8명의 호위를 받고 산책을 하는 나이든 부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경호원들은 매우 정중했고 공손했으며, 나이든 부인은 매우 단아했고 고전적 미인으로 기억된다. 한겨울 오후 2시, 따뜻한 햇볕과 함께 눈 쌓인 조그만 정원에서의 산책은 북쪽나라 모스크바의 이국적 정취와 함께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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