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음악회를 세계적 명품으로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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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음악회를 세계적 명품으로

2017.01.09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어김없이 1월 1일에 열렸습니다. 1941년부터 76년째 개최돼온 이 음악회의 올해 공연은 LA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두다멜은 올해 36세, 빈 필 신년음악회에 최연소 지휘자로 데뷔했습니다. 최근 타계한 프랑스 지휘자 조르주 프레트르가 2008년 83세에 이어 2010년 85세일 때 지휘봉을 잡아 스스로 최고령 기록을 깬 바 있으니 젊은 두다멜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만합니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된 빈 필의 신년음악회는 슈트라우스 일가의 경쾌한 음악과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됩니다. 올해에도 3시간 가까운 공연을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흥겨운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전 세계 90개국 5,000만여 명이 시청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이번에도 대형 영화관에 예약을 하고 공연 실황을 본 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의전당 신년음악회가 1월 중순에 접어드는데도 소식이 없습니다. 1988년 2월에 문을 연 예술의전당은 이듬해 1월 20일을 시작으로 매년 1월 신년음악회를 개최해왔습니다. 지난해에는 1월 8일에 열렸습니다. 음악당 개·보수를 시작한 2005년엔 1월 1일에 서둘러 신년음악회를 연 뒤 곧바로 문을 닫고 공사를 했을 정도로 계속 개최해온 공연이 29년 만에 실종된 것입니다. 

예술의전당을 관할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년 11월쯤이면 청와대나 문화부에서 신년음악회 기획회의를 열었지만 이번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회의도 소집되지 않았습니다. 기획을 했다 해도 촛불과 탄핵 분위기상 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단체와 공연장에서는 신년음악회가 올해에도 활발합니다. 세종문화회관이 시향과 함께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신년음악회를 열었고, 마포문화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13일). 군포문화예술회관(14일), 보령문화예술회관(17일), 경주예술의전당, 서산시문화회관(이상 25일) 등의 신년음악회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빈 소년합창단은 15일 익산예술의전당에 이어 21~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새해맞이 공연을 펼칩니다. 

예술의전당 신년음악회는 이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회로 자리 잡은 행사입니다. 안 열려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희망과 다짐을 함께하는 계기로 이만큼 좋은 예술행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점차 ‘국가의 풍악행사’로 음악회가 변질돼온 점입니다. 2014년 음악회의 주제는 ‘희망의 새 시대, 문화융성으로 여는 새해’였습니다. 2015년엔 ‘창의와 융합으로 다져가는 문화융성’이라는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2016년에 내세운 말은 ‘청년의 열정, 문화로 통일을 꿈꾸다’입니다. 특히 2015년 신년음악회에서는 마지막 곡으로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연주될 때 화면에 태극기가 나오자 애국가 제창과 함께 대통령을 비롯한 청중이 일제히 기립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화부는 1990년에 산하기관인 예술의전당의 신년음악회에 공동 주최로 이름을 넣기 시작했으나 처음엔 내용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신년음악회의 기획까지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예술의전당을 제쳐놓고 청와대와 문화부가 모든 걸 결정하는 완전한 국가 행사로 만들었습니다. 입장권도 일반인들에게는 팔지 않고 전석 초대로 바꿨습니다. 이렇게 관제 행사로 만들어버린 신년음악회를 올해에는 하지도 못하게 됐으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전에도 역대 대통령들은 신년음악회의 순수성을 흐려놓곤 했습니다. 2011년 1월 4일 열린 신년음악회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17년 만에 다시 참석했습니다. 당시 문화부는 ‘나눔 음악회’로 개념을 설정하고, 산하 단체에 공문을 보내 ‘공연 후원금으로 좌석 당 20만원’의 자발적 기부를 받았습니다. 강제성은 없었다지만 누가 그 돈을 안 낼 수 있겠습니까? 김 전 대통령 때는 대통령이 지루하실까 봐 교향곡의 일부 악장을 빼고 연주하는 무지와 폭거가 자행됐습니다.   

신년음악회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문화융성이라는 이름 아래 관제 행사나 벌이고,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문화를 장식품처럼 들러리 세우고, 블랙리스트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솎아 내고, 문화라는 이름 아래 사리사욕이나 채워서야 되겠습니까? 1990년 1월, 초대 문화부장관이 되자마자 신년음악회를 개최하게 된 이어령 전 장관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의 연주실황 자료를 보고 ‘꿈나무’로 발탁해 최초로 국내 무대에 서게 했습니다. 이런 안목까지 갖추지는 못한다 해도 예술공연을 순수한 예술공연답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인들 중에는 세계적인 음악인들이 많습니다. 눈부시게 성장한 젊은 예술가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연초에 국민들과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도 이제 빈 신년음악회처럼 세계적인 명품 음악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문화부는 내용에 간여하지 말고 예술의전당의 자체 기획으로 멋지고 창의적인 신년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부터는 ‘문화예술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상징적 행사로 신년음악회가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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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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