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더 흐리게 한 미국 대선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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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더 흐리게 한 미국 대선

2016.12.21


미국의 대선은 세계적 정치·경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잠재적으로 큰 이벤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양대 정당 후보들이 주요 이슈에 대해 입장을 미리 밝혀 예측 가능성을 높였고, 특히 대외적으로 2차 대전 후 국제 질서를 구축한 미국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대동소이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대선은 독특합니다. 먼저 선거의 끝이 개운치 않습니다. 푸틴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미 선거 개입과, 가짜 뉴스 (fake news)의 기여가 컸다는 분석입니다. 미 의회는 정보당국의 러시아 개입 결론을 바탕으로 전면적인 조사에 나섰고, 가짜 뉴스 범람은 얼마 전 ‘탈 진실의 세상’이라는 제목의 자유칼럼에서 다루어진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트럼프 당선자는 유세 기간 구체적인 정책 설명보다는 짧은 구호로 일관했지만 세금을 낮추고, 환경과 에너지 분야 등 규제를 축소하고, 사회간접자본분야에 투자를 늘린다는 큰 틀의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트럼프 당선과 함께 투자자들 사이에 향후 기업들의 수익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되며 미국의 주가는 연일 상승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가들로 각료진을 채운 것도 이런 기대를 키우는 모양입니다.

주가와 함께 미국의 (장기)시중금리도 오르고 있는데 이는 예금 이자로 생활하는 사람들 말고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금리가 상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달 14일 미 연지준이 약 1년 만에 단기 정책금리를 올렸고, 내년에도 3회 정도 인상을 예고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장기시중금리는 현재와 미래의 단기금리를 반영하여 같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 동안의 초저금리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감세와 재정지출 증대가 동시에 진행되면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재정적자가 발생하는데 정부는 채권 발행을 통해 시장에서 돈을 빌려 적자를 메워야 합니다. 자금 수요가 늘면 금리는 오릅니다. 이런 향후 상황에 대한 예상으로 미국의 장기금리는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1월까지 1%대 후반에 머물던 10년 만기 미국 국채의 시장금리가 대선 이후 2%를 넘어섰고, 3%를 향해 지금도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채무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됩니다. 금리 상승이 지속되면 특히 저소득층의 부담이 커지는데, 트럼프 지지자가 많았던 저소득 유권자들이 더 고통을 느끼게 될 거라는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입니다.

미국의 금리 상승은 미 달러화의 강세를 초래합니다. 주요국 금리가 매우 낮기 때문에 미국 금리가 오르면 자금이 미국으로 몰리며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 달러화 가치가 올라가게 됩니다. 11월 이후 한국 원화뿐만 아니라 여러 신흥국 통화의 미 달러 대비 가치가 현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엔화의 하락세는 충격적입니다. 지난 8, 9월 1 달러당 100엔에 근접했던 환율이 12월 들어 115엔을 넘어 계속 오르고 있는데, 엔화가 몇 달 사이에 15% 이상 절하되었습니다. 아베노믹스니 뭐니 하며 일본 정부가 애쓰던 엔화 약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트럼프가 크게 기여한 형국입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영토 강탈로 선진국들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받고 있고, 시리아의 살인마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적극적 군사개입으로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을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만추리안 캔디데이트’※라고 비하되고 있습니다. 엔화의 움직임을 보면 그는 ‘미국 최우선(America First)’ 구호를 외치지만 실제 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작(細作) 후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이해될 듯합니다.

선거 기간 트럼프는 저가 수입품 때문에 미국 제조업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며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로 응징하겠다는 약속으로 근로자 계층의 표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환율 강세로 일이 꼬이게 됩니다. 달러화 강세는 외국 수입품의 미국 내 값을 낮추기 때문에 미국의 수입은 늘어날 것입니다. 동시에 미국의 수출품은 해외에서 더 비싸져 수출은 줄어듭니다. 무역적자는 더 늘겠죠. 그래서 트럼프가 약속했던 대로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고 합시다. 국가 간 무역에서는 성서와 달리 먼저 뺨 맞고 다른 쪽 뺨을 내미는 나라는 없습니다. 보복 조치가 이어집니다.

잘 알려진 전례가 있습니다. 1930년 미국이 경기 불황 속 자국 기업을 보호한다고 수입품에 대한 평균관세를 50% 이상 올리며 나라들 간 연쇄적 보복의 악순환을 촉발합니다. 세계교역량이 계속 줄어들었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주요국의 경제공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이런 뼈아픈 경험이 근래 G20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하는 선언적 내용이 빠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돈 번 기업가 중 자신의 판단력을 과대평가하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이 병 중증인 듯한 트럼프도 역사적 경험, 국제적 규범과 조약의 의미를 알려 하거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자신의 협상력과 직감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지금도 늦은 밤 트위터를 통해 크고 작은 사안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여과 없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공적 신분이 아니었다면 그가 천재인지, 사기성 농후한 부동산 장사치인지 관심 가질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여하에 따라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경제가 비싼 비용을 치러야 될지 모릅니다. 이미 회복기에 들어선 미국 경제는 내년에도 사정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리고 미국을 제외한 세계경제의 내년 이후 전망은 오리무중이라 보입니다.

*소설을 바탕으로 1962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Manchurian Candidate)에서 유래함. 소련 정보당국이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들을 만주(Manchuria)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세뇌한 뒤 석방하는데, 그중 한 명이 나중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소련 스파이가 당선되도록 역할하게 한다는 음모를 줄거리로 함.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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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 개방 경제의 통화, 금융, 거시경제 현상이 주요 연구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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