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는 20조원 R&D를 쓰면서 진전이 없을까"
정부 지출 돈만 제대로 써도
지역과 산업 혁신 기대
톱다운(top down)→ 바텀업(bottom up) 방식
뽑기(pick-up)형 → 발굴(discovery)형 자금 지원
신기술에 과감한 조달 정책
연간 20조원에 이르는 국가 R&D 예산, 119조원에 이르는 공공조달 자금, 지방자치단체에 제공하는 보조금과 지방교부세 등 정부가 지출하는 돈만 제대로 써도 지역과 산업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이 제기됐다.
이날 토론자들은 정부 예산을 집행하는 방법과 구조만 바꿔도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조인혜/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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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다운(top down)이 아닌 바텀업(bottom up) 방식의 정책 및 예산 디자인, 뽑기(pick-up)형이 아닌 발굴(discovery)형 자금 지원, 신기술에 과감한 조달 정책 등 돈쓰는 방식만 바꿔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훨씬 더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3일 민주연구원과 국가미래연구원, 김진표 의원실 주최로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시대 미래 산업전략과 신산업 육성방안’ 세미나에서는 산업 및 지역 전문가들이 참석해 산업 혁신 관점에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기존 산업 패러다임의 성장 한계와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융합 기술로 촉발된 4차 산업혁명 화두는 먼 미래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파괴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정책 어젠더에 가깝다.
이날 참석한 전문가들은 범부처 차원에서 산업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시대 변화에 걸맞는 규칙 정립(rlue setting),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과 함께 정부 예산 기획 및 집행 방식의 적극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발제자로 나선 장윤종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4차 산업혁명은 기반 기술 출현과 기술 혁명 단계를 지나 산업이 재편되는 단계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이제는 한국형 대응전략이 무엇인가로 논의가 심화돼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생태계에서 필요한 것은 단품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에 효과와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 실증 단지가 매우 중요하며 신기술의 안착을 위해 데이터 활용을 막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의 규제는 완화하거나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종욱 산업통산자원부 산업정책기술과장 역시 “게임의 룰이 바뀌는 상황에서 기존 규제 범위를 뛰어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며 “특히 데이터 이용과 활용에 관해서는 미국, 중국, 일본 등이 규제를 많이 풀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2차 지적재산권, 개인정보보호법 등 세계에서 가장 강한 규제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율주행차의 경우 실증사업이 이뤄지는데만 3년이 걸리는 등 시대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제도, 상시감사제도 등도 융합 R&D나 스피디한 정책 실행을 더디게 하는 구조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 생태계, 창업 생태계를 위한 정부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스타트업 정책이 붐을 일으키는데는 성공을 했지만 민간주도의 자율형으로 가지 않으면 생태계 구축은 힘들 수 있다”고 말한다.
‘왜 우리나라는 20조원에 가까운 R&D를 쓰면서도 진전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해보면 대부분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다보면 지역과 현장에서 필요한 지원은 정작 이뤄지지 않게 되고 정부 과제 의존도가 커져 시장에서의 자생력을 갖기 어렵게 된다는 설명이다.
임센터장은 전세계 서비스 로봇 산업의 생태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윌로 거라지(Willow Garage)라는 벤처기업의 일화를 소개하며 ‘생태계’의 의미를 전했다.
2006년 설립된 윌로 거라지는 60명의 직원을 두고 매년 2000만달러를 로봇 연구에 투입해 마침내 2010년 개인용 로봇 PR2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 회사는 애써 만들어 4억~5억원의 가치가 있는 로봇을 팔지 않고 전세계 주요 기관, 대학에 무상 기증하는 특이한 행보를 보였다. 더불어 로봇 운영체계(ROS)까지 모두 공개해 누구라도 이를 이용해 로봇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비록 윌로 거라지는 2014년 문을 닫았지만 창업자는 그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다른 로봇으로 후속 창업을 했고, 다른 직원들 역시 창업에 나서 모두 8개의 로봇 회사가 만들어졌다. 또 이 회사의 ROS는 소프트뱅크의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 개발의 기반이 되었으며 UC버클리나 우리나라의 DGIST 등 대학들이 로봇연구를 진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와는 환경이 다른 미국의, 그것도 매우 독특한 기업의 사례이지만 정부의 R&D 정책도 이같은 생태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임센터장의 지적이다.
토론자로 나선 김준연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의 공공 조달 시장과 R&D 예산에서의 집행 방식만 바꿔도 산업 혁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달 시장은 정부가 게임의 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장으로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에 대해서는 저가 입찰방식을 유연하게 적용한다면 좋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조달청은 최근 정부 조달 사이트인 나라장터와는 별도로 실적이 없는 벤처, 창업기업이라도 기술과 품질이 우수하다면 조달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벤처나라’ 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다.)
특히 과거처럼 전략산업과 특정 기업을 선정해서 지원하는 승자뽑기 방식을 지양하고 앞으로는 사회적 가치가 높은 범용기술 혹은 중간기술을 다수의 민간기업과 함께 발굴하는 방식으로 R&D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방 산업을 지원하는 방식에 관한 논의도 이뤄졌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창업 환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된 현재로는 지방의 산업 혁신과 생태계 구축은 점점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전제하고 “그러다보니 지자체가 자체 산업전략을 갖기보다는 정부의 예산을 따내는데 사활을 거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 정부가 아닌 지자체가 정책 디자인을 하고 정부부처별 각 지방 조직들이 지역 사업 기준을 마련해 이를 통합적으로 예산에 반영하고 실행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센터장은 또 “지방의 경우 4차 산업혁명이 반드시 하이테크형으로 이뤄질 필요가 없으며 지역 특성에 맞는 전략과 적정한 기술로 지역 성장 기반를 갖도록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조인혜 객원기자 podo03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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