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내 운명”

카테고리 없음|2016. 11. 14. 22:33


인터뷰 - 김원일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발행인


  "삶은 접부채와 흡사하다고 봐요. 부채는 대(竹)로 된 부챗살로 겹겹이 접혀 있잖아요. 


펼치기 전에는 그 안에 어떤 그림이 담겨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펼친 후에야 비로소 손에 쥐고 흔들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것처럼 천천히 이 곳 모스크바에서 제 인생의 지도를 펼쳐 보이고 있답니다."



모스크바 콜스톤 호텔 지하에 있는 한 한국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김원일(48 사진)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발행인은 과묵하고 근엄한 일반 언론인들과는 다르게 대화 중간 중간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98년 시작된 뒤바뀐 남매 간 ‘권유’의 운명  © SPUTNIK/ ILONA MATSOLA 제 6차 한-러 친선 '백만송이 장미' 축제 9 2011년 6월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창간호를 냈으니 올해 5년째다. 1990년대 초반 소련 붕괴 이후 유입된 교민 1세대와 2000년 이후 한국 대기업의 러시아 시장 진출에 탄력을 받으면서 주재원이 늘긴 했지만 한국 유학생을 포함해 모스크바 교민 규모는 어림잡아 2천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작은 교민사회에서 잡지 발행 의사를 내비치자 지인들은 손사래를 쳤다. 기존에 한인정보지가 여러 개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인 규모도 크지 않아 ‘쪽박차기 쉽상’이라는 반응이었다.


“잡지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모스크바 교민 사회 활성화를 돕고 나아가 한·러 관계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어요. 2000년 초반 까지 만해도 한국의 유력 방송사와 일간지 신문사 특파원들이 모스크바에 상주했어요. 2008년 금융 위기가 불어 닥치자 대부분 철수했고 지금은 KBS와 연합뉴스 특파원만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패권경쟁에서 역사적으로 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습니다. 


유엔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 갈등과 대화 국면에도 주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정치외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 정책은  한러, 남북러 경제협력에 있어서도 한국에 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외 정책은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아직까지도 사실상 걸음마 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고려인 신문 텐 발렌틴 편집장과 함께


사회적 역할 고민… 2011년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발행

고등학교 시절부터 남달리 한국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김원일 발행인이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선 건 2001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해 사회학부에서 한러관계를 공부하면서 부터다. 외국계 신용카드회사에서 근무하다 부친의 타계로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IMF의 매서운 칼바람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고 그는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후 새로운 인생방향을 모색하던 중,  학문에 대한 꿈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당시 손아래 동생인 김은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당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문학박사 과정)의 추천으로 늦깎이 나이에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 SPUTNIK/ ANDREY IGLOV 아프리카인들 ‘러시아.. 살벌하지만 반전 있다!’ 애초 김은희 교수가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것은 김원일 발행인의 추천 덕분이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동생에 러시아 문학을 공부해볼 것을 권했고 평소 오빠의 말을 잘 따르던 김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지원, 합격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이어서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솔제니친을 주제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제 동생 김은희 교수가 대학을 입학했던 1988년은 소련과 동구권이  수십 년 간 굳게 닫혀 있었던 빗장이 풀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알려졌던 러시아는 한국사람들에겐 그야말로 미지의 땅이었어요. 당시 러시아 전공자가 많지 않았고 문학의 본고장인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동생에게 뜻있는 일이다 싶었습니다."


김원일 박사를 러시아로 이끈 건 동생이지만 애초에 동생을 통해서 인연의 매듭을 엮은 것은 본인 자신이었던 셈이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2003년 '‘현대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협력’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학업을 계속해 2009년 ‘20세기 중반∼21세기 초 한반도 정치·군사적 위기 상황에서의 조정자로서의 러시아의 역할’을 주제로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거의 10년 간 낮에는 학교에서, 저녁에는 생업인 호텔 일을 병행하며 주경야독 하였다. 의례 유학 생활을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그는 귀국을 단념하고 모스크바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10년 전 혈혈단신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미 곁에는 아리따운 러시아 부인과 금쪽 같은 4명의(당시 3명)의 아들 딸을 거느린 가장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회길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소장 송별식


‘한국과 러시아 사이를 이어주는 중매쟁이’ 

– 여동생(김은희)은 러시아 학자, 아내(김 나탈리아)는 한국학 학자가 된 사연 현재 러시아 고등경제대학 한국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김 나탈리아 교수를 한국학으로 이끈 것도 그다. 현재는 아내가 된 나탈리아 김(결혼 전 러시아 성 플로트니코바)과 그가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망한 젊은 학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백년가약을 약속하면서 김 발행인은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음식을 할 줄 알아야 하며, 아이는 다섯 명을 낳아줄 것을 말이다. 김 발행인의 순수한 마음을 읽었는지 김 나탈리아 교수는 그런 남편의 뜻을 잘 받아들여 주었다. 자신의 아내가 남달리 명석하고 총명하다는 것을 안 그는 학업을 지속할 것을 아내에게 권유했고 자신의 동생에게 노어노문학을 권했듯 이번에는 아내에게 철학에서  한국사로 전공을 바꾸어서 박사 과정을 밟을 것을  조언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힘입었는지 그녀는 2009년 러시아 외무성 산하 외교아카데미에서 ‘1945∼1948년 남한 사회지형과 정치투쟁’을 주제로 역사학 박사 학위 받았고 최근에는 광복 후인 1945년부터 1948년 정부 수립까지의 기간에 남한에서 있었던 사회·정치적 투쟁들과 분단 과정을 연구한『1945년∼1948년 남한 정치사』를 발간했다. 러시아에 북한의 정치사를 다룬 책들은 많지만 남한 정치사에 대해 연구한 것은 이 책이 유일무이하다.


김원일 , 김나탈리아 부부


"옛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회에 대혼란이 찾아왔었죠. 사회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이행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자란 젊은 학자들은 학계에 남지 않으려고 했어요. 대학 정교수들의 급여가 고작 200달러 정도하던 시대였거든요. 강대국인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을 연구하는 젊은이들이 없을 때였죠. 그래서 아내에게 한국학을 공부하도록 조언했습니다. 줄탁동기라고 봐요. 


아내의 저작인『1945년∼1948년 남한 정치사』는 함께 집필에는 저도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도 책 서문에 "내 남편 김원일에게 이책을 바친다."라는 헌정사를 크게 써넣었겠죠(웃음..) 한국인인  제가 한국학자의 시각에서 가질 수있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입장과 분석에 대해서 많이 조언했고, 가능한 한 다양한 종류의 현대사 관련 자료확보를 위해서도 함께 노력했습니다.  러시아 학계에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담은 책은 많이 있지만  한국 정부 수립 등에 대해서는 연구가 안돼 있었어요. 러시아 한국학계가 제대로 된 한반도 연구를 위해 필요한 저서라고 봐요.   동생을 러시아 학자로, 아내를 한국학 학자로 이끈 그의 '한러 중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변지인들이 자녀들의 유학 문제로 고민할 때 그는 러시아 유학을 권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한러 간 관계가 순탄하지 않지만 앞날의 비전을 생각한다면 미래를 위한 좋은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자녀의 유학을 고민하는 지인들이 적지 않아요. 한국사람들은 유학하면 으례 영어권 국가나 중국, 유럽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학을 염두에 둔 사람들의 국가 목록에 ‘러시아’는 없어요. 


지금은 노어노문학 교수가 된 동생에게 제가 러시아 문학을 권한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제 동생에게 권했던 것처럼 한국의 지인들에게도 러시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권해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들의 자녀들이 훗날 한러 관계 발전에 기여하는 소중한 인재이 될지도(웃음).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이러한 작은 발걸음이 모여서 인적 교류에 물고를 트고 시나브로 한러 간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발행인이 본격적으로 한러 사회 문화교류 역할을 맡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모스크바 한인회장에 출마한 이후부터다. 그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공공외교 분야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를 살리고 싶었다. 이 때는 양국 관계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또다른 방법으로 모스크바 프레스&뉴스를 발행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언론매체라고는 한국의 연합뉴스, KBS, 모스크바 교민지가 전부였다. 러시아 시각을 담은 정보를 한국인들을 위해 제공하는 언론사가 없었던 것.  


"지금은 러시아 포커스나 스푸트니크 코리아 등이 있지만 잡지를 창간했을 때만해도(2011년) 러시아 관련 내용을  한국인들에 한국어로 전달하는 정보지나 인터넷 사이트가 없었어요. 모스크바 프레스&뉴스를 처음 발행할 때 포부가 있었다면 러시아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다양한 소식들을한국인들에 전하는 것이 었어요. 그리고 2013년에는 반대로 러시아인들에게도 한국에 대해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합본 형태로 서울뉴스도 창간하게 됐죠. 제가 알기로는 서울뉴스는 러시아CIS지역을 통틀어도 러시아어로 된 한국을 알리는 유일한 잡지입니다." 2011년 모스크바 한인회장 당선… 법인화 이끌고 활성화 발판 마련 잡지 창간후 그는 모스크바 한인회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교민사회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보자는 바람에서였다. 모스크바 현지 특성상 여타 국가에 비해 한인 사회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을 뿐더러 교민 사회의 무관심으로 한인회의 존립 가치가 심하게 흔들릴 때였다.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인 한인회의 위상은 차치하고 존재감마저 없는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회장에 당선된다 한들 발전 가능성은 제쳐두고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벅찰 거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사무실부터 마련했다. 안정적으로 한인회 사업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실무진과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실한 한인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조직부터 정비했다. 사업과 예산을 공개하고 투명하게 운영하면 한인들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법인화가 선결 과제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모스크바 한인회 발족 11년 만에 법인이 됐다.   "당시 모두들 법인화 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사업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관리하려면 법인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우선 과제로 뽑았었죠. 조금 까다로웠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어요. 반년 만에 법인화를 이끌어냈거든요(웃음)" 


그는 교민 간 친목도모를 통해 한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한편 대외적인 활동을 통해 한인회의 위상 강화도 꾀했다. 여러 난관에 부딪혀서 활동에 적지 않은 제약이 있기도 했지만  2013 카잔 하계 유니버시아드 및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교민지원단 결성하여 한국선수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행사의 성공적인 진행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밖에도 한국와 모스크바를 왕래하며 지방자치단체들과 MOU를 체결하고 상호협력의 길을 텄다. 그리고 2014년부터 남북통일 정책을 자문하는 대통령 직속기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모스크바협의회장을 맡아 한국학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만남의 광장'을 열어 한국 및 러시아 학계 인사들간 네트워크 구축에도 한몫했다.단체장이 됐을 때 그에게 힘이 돼줬던 건 러시아 인연들이었다. 정치, 사회, 역사 등 인문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김원일 발행인은 모스크바대학 석박사 과정을 밟을 때부터 여러 러시아 한반도 전문가들과 교류했다. 누가 소개시켜준 것이 아니다. 발품을 팔았다. 한러 관련 행사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학술 세미나, 콘퍼런스, 포럼, 한국학과가 개설된 모스크바 대학 등. 그렇게 보낸 시간이 15년이다. 매년 개최하는 '러시아 독립국가연합(CIS) 한국학자 학술대회'는 10년 째 빠지지 않고 참관해왔다.  CIS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이 패널로 참석해 동북아 국제 정세부터 북핵 문제, 한반도 군사,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곳에서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의 토론이 이어지는데 개괄적이고 전체적인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밑그림이 나온다


모스크바 콜스톤 호텔 지하에 있는 한 한국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김원일(48 사진)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발행인은 과묵하고 근엄한 일반 언론인들과는 다르게 대화 중간 중간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98년 시작된 뒤바뀐 남매 간 ‘권유’의 운명 


2011년 6월 모스크바 프레스&뉴스 창간호를 냈으니 올해 5년째다. 1990년대 초반 소련 붕괴 이후 유입된 교민 1세대와 2000년 이후 한국 대기업의 러시아 시장 진출에 탄력을 받으면서 주재원이 늘긴 했지만 한국 유학생을 포함해 모스크바 교민 규모는 어림잡아 2천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작은 교민사회에서 잡지 발행 의사를 내비치자 지인들은 손사래를 쳤다. 기존에 한인정보지가 여러 개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인 규모도 크지 않아 ‘쪽박차기 쉽상’이라는 반응이었다.


“잡지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모스크바 교민 사회 활성화를 돕고 나아가 한·러 관계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어요. 2000년 초반 까지 만해도 한국의 유력 방송사와 일간지 신문사 특파원들이 모스크바에 상주했어요. 2008년 금융 위기가 불어 닥치자 대부분 철수했고 지금은 KBS와 연합뉴스 특파원만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는 세계패권경쟁에서 역사적으로 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습니다.  유엔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 갈등과 대화 국면에도 주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정치외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 정책은  한러, 남북러 경제협력에 있어서도 한국에 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외 정책은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아직까지도 사실상 걸음마 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학술대회에 참가해 한러 관계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김원일 발행인


러시아 한국학자들과의 끈끈한 인연은 신뢰와 믿음에서 출발

원로 한국학자 바짐 트카첸코, 전 북한주재 러시아대사 발레리 수히닌, 알렉산드르 제빈 한국학센터 소장, 알렉산드르 보론쵸프 한국학과장, 일리야 댜치코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 김영웅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선임 연구원, 이리나 카사트키나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장, 예카테리나 포홀코바 러시아국립외국어대학 교수 등 내로라하는 한반도 전문가 및 교육자들을 이런 자리를 통해 알게 됐다. 김원일 발행인이 그간 신뢰와 믿음으로 쌓아온 이러한 인적 자원들이 그의 한국과 러시아간 사회 문화 학술 교류 활동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줘왔다. "인간 관계의 출발은  신뢰와 존중, 믿음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국가 관계도 다르지 않아요. 신뢰와 믿음을 얻고 존중심을 갖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첫걸음이 돼야 합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학술회의나 포럼, 한러 간 문화교류행사에 제가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유에요.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쌓은 러시아 전문가들과의 관계 덕을 많이 봤어요. 대표적으로 민주평통모스크바한인협의회장을 맡았을 때 한러 포럼을 준비했는데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장과  제이둘라 유즈베코프 모스크바국립대교수, 안드레이 이바노프 선임연구원, 수슬리나와 이바노프 교수, 알렉산드로 페도롭스키 아태센터장 등 쟁쟁한 한반도와 동북아지역 전문가들이 선뜻 발표자와 패널로 참석해주셨지요. 지속적으로 교류했던 러시아 지인들이 아니었으면 그런 대규모 행사를 치르지 못했을 겁니다.  세계 환단학회 학술대회가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죠. 한민족 상고사를 살펴 보는 포럼이었는데 저와 친분이 있는 올가 디야코바 교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와주셨어요. 그녀는 발해의 성곽축조양식은 중국성곽 축조양식과 확연히 구별된다면서 성곽축조양식만을 보더라도 발해가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국가가 아니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한민족의 국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이었거든요. 이런 주요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공론화되는 현장이었지요" 


고려인 학자 김영웅 소장과 함께


국제 관계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혼재한다. 국가 간 발전을 도무하는 추진 주체는 여럿이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시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움직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왜 민간인 신분으로 한러 교류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을까. "수교를 맺은 지 26년이 지났지만 한러 관계는 걸음마 단계입니다. 교역량으로 본다면 수백배가 늘었지만 국가 간의 관계가 단순한 물건을 사고 파는 관계로 전락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한러 관계 발전에 있어 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늘 생각해왔어요. 모스크바 한인회장을 할 때나, 민주평통모스크바협의회장을 맡았을 때나 늘 변함없이 가지고 있던 바람이라 한다면 한 개인으로서 제가 속한 사회와 한러 관계 발전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였어요.  제가 가진 역량으로 한러 관계에 있어 거시적인 틀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사회 문화 교류를 통해 조금씩이라도 한러 간 관계 발전에 제가 기여할 수는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사람은 다방면적인 존재잖아요?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하는 일이죠.  


하지만 저는 인간의 활동영역에서  경제활동 못지 않게 사회적인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보다 나은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커다란 움직임에 비록 미비하지만 저도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노력해나가야 한다는 확신이 이제는  제 삶의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어요." 국가들 서로간에 이해 부족은 관계 발전을 더디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국가들 사이에 민간차원의 사회 문화등 다양한 교류사업이 중요한 이유다. 현대 국제관계에서는 국가 간의 화합과 협력관계 강화에는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외교적 노력에 못지않게 민간차원의 친선과 상호 문화 교류활동도 중요하다. 한국과 러시아 간 경제협력은 지속적으로 추진중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인 교류와 협력이 부재한다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인문학적 교류가 중요한 이유다. 




지난 8월에는 공공외교법이  통과됐다.  "국가와  부부 관계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환경, 언어, 문화를 향유해왔던 러시아인인 아내와 한국인인 제가 각자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동질감을 갖는데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지요. 국가 관계 역시 그런 서로간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서 시나브로 발전해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김원일 발행인이 민간교류 차원에서 실시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SM갤러리'다. 한국미술품을 상설 전시하는 갤러리를 오픈한 것. 러시아 CIS지역에 한국의 미술작품들을 소개하기 위해 문을 연 SM 갤러리는의 S는 ‘서울’과 M은 ‘모스크바’의 영어 이니셜을 땄다.전통적인 색채가 짙은 풍속화를 비롯한 한국화와 현대적기법의 유화작품 등을 러시아인들은 이곳에서 상시 관람한다. 러시아 K팝가수들과 한인들이 어우러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부르는 등 깜짝 이벤트도 열고 있다. 


저는  사색형이고 내향적인데…  그가 모스크바서 두드라지게 된 이유 그의 모스크바에서의 다양한 사회 문화 활동에 박수를 보내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달갑지 않은 시선도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아무래도 두드라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가 외국인에 호의적이지 않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패하기도 하지만 워낙 작은 한인 사회다보니 그의 다양한 활동들이 한인들 사이에서 회자될수밖에 없다. "제가 러시아 한반도 전문가들을 만나고 학술회의에 참가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색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도 사실 적지 않았어요. 이런 활동 자체가 모스크바 한인사회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위성락 전 주러 한국대사에 기념패 전달


하지만 이제는 모스크바에 저같이 조금이라도 나서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봐요. 통신 기술의 발달로 세계가 좁아지고 있잖아요?  외교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요. 미국도 중국도 연성권력의 중요성에 대해 입이 달도록 이야기하고 있어요. 19세기의 전통적 외교는 정부를 상대로 했지만 현재는 러시아 사람들 개개인을 직접 대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야는 대사관 등 공관의 역량으로  소화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한국인이던 러시아인이던 저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조금은 나대는 사람말이죠!(웃음)" 


김원일 발행인 자신은 기본적으로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사교적이기는 하나 본래 천성은  책읽고 혼자서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그는 어느날인가 어느 시골 장터에서 놀고 있었다.  왁자지껄 활력이 넘치는 장날 풍물의 흥겨운 리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자신과 함께 놀던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뒤로 멀찍하니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언뜻 앞을 보니 호랑이가 한 마리 나타나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장터에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남들과 함께 뒤로 물러날 기회를 그만 놓쳐버렸다. 그리고 다들 자신을 주시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차마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길은 한걸음 한걸음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판 호랑이와 붙어보는 것이다.  


"선택은 두가지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처럼 물러나든 앞으로 나아가든요. 나 마저 뒤로 물러나면 무척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 사람들에게 그리고 호랑이에게도….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게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모스크바에 사는 한인 가운데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 운명이구나, 내 길이구나 생각하고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나갈 뿐이에요(웃음)"


1998년부터 2009년까지 학업을 병행했던 시간은 준비기간이라고 했다. 2010년~2015년까지 모스크바 프레스&뉴스를 창간하고 한인회장, 민주평통 모스큽협의회장을 역임한 5년의 시간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삶은 부채를 펴나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저는  아직 부채의 절반도 펼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작이에요. 앞으로 계속 부채를 펼쳐나가야지요.. 제가 가진 부채 그 안에 어떤 그림이, 어떤 세상이 담겨있을지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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