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손실 음원-못 듣던 음역은 듣게 됐지만 …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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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손실 음원-못 듣던 음역은 듣게 됐지만 …

2016.11.03


가을은 음악 듣기에도 좋지요. 특히 단조(短調)의 애잔함은 가을의 쓸쓸함을 달래기 좋습니다. 슬플 때는 슬픈 곡이, 기쁠 때는 기쁜 곡이 그 감정을 더 고양시킨다고 하지요. 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3중주 50번이나 하차투리안의 왈츠 같은 쓸쓸하고 슬픈 곡을 일부러 찾아 듣습니다.

올 가을엔 ‘무손실음원(無損失音源)’으로 음악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손실음원이란 문자 그대로 손실이 없는 음원입니다. 오랜 LP시대를 거쳐 1980년대 초반에 개발된 CD가 시장을 지배했으나 잠깐에 지나지 않았고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MP3가 음원시장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MP3는 판(혹은 디스크)이 있어야만 하는 LP나 CD와는 달리 인터넷으로 음원을 받아 MP3 플레이어에 저장해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들을 수 있는 장점으로 인기를 모았지요. 지금은 MP3 플레이어도 퇴장하고 휴대전화기나 컴퓨터에 내장된 재생시스템으로 MP3 음원을 찾아 듣는 시대가 됐습니다. 편리성에서는 어떤 것도 MP3를 당할 수가 없게 된 거지요.

MP3는 ‘손실음원’입니다. 용량이 크면 인터넷으로 음악을 보내고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손실을 만들었습니다. 큰 물건을 작은 물건에 집어넣으려면 일부를 잘라내야 하듯 데이터(음악)의 용량이 크면 줄이고 압축해야만 인터넷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머리 좋은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음역(音域), 즉 가청범위 밖의 음역은 어차피 사람의 뇌가 인지하지 못하므로 제거해도 음악 감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 MP3 개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음역의 손실이 있긴 하지만 MP3는 음악 듣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다면 이렇게 지금처럼 음원시장을 지배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MP3가 손실음원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원음(原音)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광(狂)’들의 끝없는 희구(希求)는 더 발달한 인터넷 기술의 도움으로 충족되게 됐습니다. 인터넷의 용량이 전보다 훨씬 커진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무손실음원’은 아래위를 자르지 않은 음악을 인터넷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 오디오 광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무손실음원은 컴퓨터로 듣습니다. PC에 음원을 저장하고, ‘코덱’이라는 전용 소프트웨어를 깐 후 이 소프트웨어를 구동해주는 ‘DAC’라는 하드웨어를 거쳐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합니다. 그래서 무손실음원 청취시스템은 ‘피시파이(PC-Fi)’라고 불립니다. 고음질 청취시스템을 ‘하이파이(Hi-Fi, High-Fidelity)’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늦은 오후, 가을 햇빛이 투명한 공기 사이로 비치던 시간, 무손실음원은 경이였습니다. 가늘고 가벼운 곳은 가늘고 가볍게, 굵고 육중한 곳은 굵고 육중하게 흘러나온 바흐는 거실 구석구석을 메우고 몸속 깊이 들어와 감동과 흥분으로 핏줄을 뛰게 했습니다. 시간이 멈추고 음악만 흘렀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30여 년 전 CD로 음악-베토벤의 코랄 판타지-을 처음 들었을 때의 아찔함과 찌릿함이 전류처럼 내 몸과 마음을 관통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요. 들을 수 없는 음역을 가청범위 밖의 음역이라고 할진대, 그것들을 포함했다고 해서 소리가 더 좋아진다? 못 듣는 소리는 안 들리는 소리일진대, 안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못 듣는 소리를 듣고 감동이 흘렀다? 그게 말이 된다?

그렇습니다. 무손실음원으로 못 듣는 소리, 안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 전자적으로, 음향학적으로 설명은 못하겠지만 콘서트홀의 생음악이 재생음악보다 듣기 좋은 것은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가청범위 밖의 음역, 안 들리고 못 듣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나하나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것들이 다른 소리들과 어울렸을 때는 의미 있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던 끝에 또 다른 의문이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못된 소리들과 관련된 의문입니다. 이 사회는 언제나 시끄럽습니다. 온갖 것들이 만들어낸 소란이 사방의 소음과 섞여 악음(惡音)을 생성합니다. 사랑, 관용, 배려…. 이런 것들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퍼붓는 악다구니만 남은 것 같습니다.

내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악다구니는 손실음원에서 나오는 것인가, 무손실음원에서 나오는 것인가? 손실음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잘려나간 음역은 어느 부분인가? 어떻게 살려야 아름다운 소리가 되살아나는가? 무손실음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떤 음역을 얼마나 어떻게 잘라내야 이 사회에 화음이 살고, 고운 멜로디가 흐르게 될 것인가? 내 이 소리[글]는 또 무엇인가? 내 생각과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소음으로 다가가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의문에 스스로는 답을 찾지 못해 또 다시 새로운 곡으로 마음을 달래는 가을밤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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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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