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생가(生家) 어디에 있나요?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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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생가(生家) 어디에 있나요?

2016.10.19


지난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습니다. 성왕(聖王)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훈민정음을 창제해 반포한 지 570주년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해 몇 가지 단상이 스쳐 지나갑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의 다섯 째 아들이자 3대 왕인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이 애초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이는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이미 왕세자로 책봉한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이분이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조선 개국부터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비롯해 실로 엄청난 갈등의 드라마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 이방원이 왕위를 찬탈하지 않고 세종대왕이 그 뒤를 잇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공허했을까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종대왕이 문화 예술은 물론 과학, 경제 및 군사 영역을 위시한 모든 분야의 발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에 “노비(奴婢)에게도 임신 휴가를 주라”는 명을 내릴 만큼 애민(愛民) 정책에 바탕을 둔 복지 개념을 실천한 군주라는 걸 생각하면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 애민 정신 아래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분을 성왕(聖王) 또는 대왕(大王)이라 부르며 칭송하는 이유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우문(愚問)을 던져봅니다. 만약 세종대왕은 물론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세종대왕과 한글이 그만큼 역사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언어 문자인지는 권위 있는 세계적 석학들에 의해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 노마 히데키(野間秀樹)는 저서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돌베개, 2011)에서 “소리가 글자가 되는” 한글의 기적 같은 우수성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언어학 교수 램지(Samuel Robert Ramsey)는 “한글은 세계의 알파벳이고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 한글 발명은 어느 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성취이자 기념비적 사건이다”라고 극찬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토록 추앙하는 세종대왕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잘 모시고 있을까요?
오래전 일입니다만, 고위 국가 공무원을 지낸 지인으로부터 세종대왕이 어디서 탄생했는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선조 4대 왕, 성군으로서 한글 창제를 비롯한 다양한 업적,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 이런 단상이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전부였습니다. 세종대왕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었습니다. 순간,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필자가 얼마 전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고 찾아간 곳은 옛 한양의 준수방(俊秀坊),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지역이었습니다.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성왕의 생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교통 붐비는 대로변에 세워진 작은 표석(標石, 사진 자료)이 알려줍니다. 표석에는 “세종대왕 나신 곳-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숭앙한다는 성왕을 모시는 우리 사회의 눈높이는 고작 그 정도였습니다. 부끄럽다 못해 분노와 좌절감이 교차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생가 터’ 주변을 과감히 성역화해서 성왕의 생가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여도 포기하고 손을 놓기에는 대왕의 역사적 존재감이 너무나 육중하고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50년의 세월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필자는 주창(主唱)합니다.

지난 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이나 작금의 우리 세대보다 미래 세대가 영위할 문화 및 역사의 시공간은 비교할 바 없이 큽니다. 더욱이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이라는 뜻깊은 날을 맞이해 우리 모두가 성왕의 ‘생가 터’ 복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민족정신이 깃든 ‘터’를 소홀히 하고 어찌 미래 세대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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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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