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외교 수장의 다면극(多面劇)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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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 수장의 다면극(多面劇)

2016.09.12


중국 경극(京劇)에는 변검(變)이라는 기예(技藝)가 있는데 여러 장의 얇은 가면을 미리 쓰고 나와 얼굴을 한 번 돌리거나 큰 소매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한 장씩 벗어 나갑니다. 순간적인 동작으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어 마술처럼 보입니다. 변신술의 대명사로 회자됩니다.

요즘 한중 관계가 껄끄러워져서 그런지 외교부장 왕이(王毅, 1953~ )의 표정에서 ‘변검’의 기예를 읽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1880년대에 원세개(袁世凱, 1859~1916)가 고작 20대의 나이로 조선 조정에서 무모하게 처신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원성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근래 중국이 대국망상증에 단단히 걸렸다고 걱정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이 ‘G2 국가’ 반열에 오르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게 중론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과시하는 모습은 언제나 거부감만 초래할 뿐이다”라는 만고의 진리가 생각납니다.

대만의 백양(伯揚) 교수가 쓴 《중국인의 의식구조-추악한 중국인-》(文潮社, 鄭惇泳 譯, 198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백양 교수는 중국인의 의식구조를 언급하며 크게 개탄합니다. “태국의 난민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은 90퍼센트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추방된 중국인이다. ……국적이 아니라 혈통 혹은 문화적 의미에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중화문화대학 화교연구소의 어느 여학생이 이 난민수용소에 봉사단으로 파견되었다. ‘……너무나도 비참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중국인이 무슨 죄를 범했다는 것인가? 어째서 중국인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녀는 중국인 난민들이 중국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태국 경비원으로부터 비인간적으로 혹독하게 홀대받는 게 너무도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난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왠지 씁쓸한 것은 백양 교수가 그리도 걱정하던 중국인을 작금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서구 문화권의 외교관들에게서 중국 외교 수장 왕이에게서와 같은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생소했다는 얘기입니다.

무릇 외교관의 ‘직업적 언어와 행동’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네와 사뭇 달라야 합니다. 이를테면 결코 즉석에서 ‘Yes’라고 해서도 아니 되지만, 섣불리 ‘No’라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법입니다. 이게 바로 외교관의 첫 번째 행동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구 문화권에서 외교관은 단정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않을뿐더러 얼굴 표정이나 몸짓에서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을 ‘외교관의 교과서적’ 언어와 행동으로 여깁니다.

얼마 전 EU와 영국 사회는 브렉시트(Brexit)라는 엄청난 정치적 결과를 놓고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토록 찬반 논쟁에 열을 올리면서도 막상 외교 무대에 서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걸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국 외교부 수장이 우리 대표나 북한 대표를 만날 때 짓는 다색, 다양한 얼굴 표정은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정말이지 현대판 원세개를 보는 듯싶습니다.

1968년 ‘프라하(Praha)의 봄’이 구소련군의 탱크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참담한 모습을 보며 한 체코 원로 지식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권력은 없는가?” 그 원로 지식인의 독백이 자주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중국이 ‘G2 국가’라면 그에 걸맞은 겸손의 미덕을 보이는 게 대국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전 백양 교수가 ‘중국인의 의식구조’저서의 부제로 붙인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병폐가 다시금 도질까 걱정스럽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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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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