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들의 비밀계좌 '멍텅구리 통장'
경제문화 Economy, Culture/경제금융 Economy Finance2015. 1. 16. 10:09
인터넷 뱅킹·모바일 뱅킹 불가능,
본인이 지점에 가야 거래 가능해
아내가 월급 관리하는 요즘 세상,
집에서 금융主權 빼앗긴 남편,
비상금 관리용으로 몰래 활용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케이콘텐츠
은행원 A씨는 매월 월급날이 되면 은행 지점을 찾는다. 그는 급여를 인터넷·모바일 뱅킹이 되지 않는 특수한 계좌를 통해 받은 다음 10만~15만원 정도를 '비자금'으로 떼고 나머지를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에 이체한다. 계좌 이체를 할 때는 보내는 사람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은행 급여'로 바꿔 달라고 창구 직원에게 요청한다. 그가 사용하는 '특수한 계좌'는 전자금융 거래가 되지 않고, 은행 창구나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을 통해서만 거래를 할 수 있는 이른바 '보안 계좌'다. 인터넷 뱅킹을 통해 이 계좌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A씨는 이 방법으로 보안 계좌에 지금까지 약 300만원의 비자금을 적립해 놨다. 그는 "집사람이 내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를 가지고 나의 모든 금융 거래를 관리하기 때문에 조금 귀찮지만 이런 방법을 쓰고 있다. 통장과 카드는 사무실에 보관하는 방식으로 계좌가 들키는 '사고'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B씨는 지난해 말 회사가 보너스 지급을 공지한 직후 총무팀에 전화를 걸어 입금 계좌를 일시적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보너스를 넣어달라고 회사에 요청한 계좌 역시 인터넷·모바일 거래가 되지 않는 보안 계좌다. 그는 입금된 보너스 중 약 100만원을 뗀 다음 나머지를 원래의 급여 이체 통장에 입금했다. 입금자 이름을 회사명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B씨는 "3년째 이런 방법으로 보너스에서 약간의 비자금을 떼고 있다. 우리 팀의 절반 정도가 보안 계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인터넷 뱅킹의 확산으로 은행 창구를 찾는 고객들의 발길이 확 줄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선 오프라인으로만 거래가 가능한 보안 통장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런 보안 통장은 속칭 '멍텅구리 통장'이라 불린다. 인터넷·모바일 뱅킹 같은 '스마트'한 서비스는 되지 않고 오프라인 거래만 된다고 해서 '멍청이'란 뜻의 '멍텅구리'란 별명을 얻었다. 가입자 2년 전보다 50% 늘어 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등 4대 시중은행에 따르면 '멍텅구리 통장'의 수는 2012년 말 8만1892개에서 2014년 말 12만6383개로 54% 늘었다. 추가 수익을 안겨주는 서비스가 아니라서 은행들이 홍보를 딱히 하지 않고 있는데도 '비자금을 관리하기 좋은 계좌'라는 소문이 퍼져 서비스 가입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이다. 계좌에 쌓인 돈도 만만치 않다. C은행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약 1만1000계좌에 총 6874억원이 쌓여 있었다. 계좌 하나당 평균 6300만원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 은행 관계자는 "일반 직장인들의 잔액은 보통 수백만원 수준"이라며 "하지만 부인은 물론 자녀에게도 현금 자산을 숨기고 싶어하는 고액 자산가들이 보안 계좌에 수억원씩을 넣어 놓는 경우가 많아 평균 잔액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이 같은 '은둔형 계좌' 서비스에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농협·우리·신한은행은 '보안 계좌', 국민은행은 '전자 금융거래 제한 계좌', 기업은행은 '계좌 안심 서비스', 하나은행은 '세이프 어카운트'라고 부르는 식이다. 서비스에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인터넷·모바일 뱅킹을 통해 계좌를 조회하거나 금융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같지만, 더 철저한 보안 조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둔 은행들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은행의 '계좌 안심 서비스'의 경우 고객이 원할 경우 미리 지정해둔 지점에서만 계좌 조회와 입·출금이 가능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우리은행은 '보안계좌'와 함께 지정한 지점에서만 금융 거래를 할 수 있는 '시크릿 통장' 서비스를 별도로 제공 중이다. 원래 취지는 '금융 보안' 목적 보안 계좌의 당초 도입 취지는 비자금 조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이스피싱 같이 전자 거래의 취약점을 악용한 금융 사기가 늘자 2007년 금융감독원이 보완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이에 은행들이 인터넷·모바일 뱅킹을 원천적으로 막는 서비스를 내놓은 것이 시초였다. 금융권 관계자는 "원래 보안 통장은 전자 금융거래의 허점을 이용한 범죄로부터 계좌를 안전하게 지키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초기엔 가입자가 거의 없었는데, 2~3년 전부터 비자금 관리에 용이한 통장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집사람에게 금융 주권(主權)을 빼앗긴 '아저씨' 가입자가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멍텅구리 통장'의 인기가 '신상(身上)'을 감추기 어려운 디지털 시대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있다. 디지털 금융 주권을 상실한 가장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오프라인 전용 통장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서병호 연구위원은 "디지털 시대엔 예전보다 쉽게 신상 정보가 노출된다. 이런 시대에 조금이나마 경제적 자유를 찾으려는 가장들이 최소한의 '금융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기 위해 보안 통장에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조선비즈 | 김신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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