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글] 봄날에 쉬이 섞이려면

 

 

봄날에 쉬이 섞이려면

2021.04.01

 

봄과 함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습니다. 몇 개월 고민하다 직장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10년 가까이 다니던 경제전문지를 나와 종합일간지로 오니 적응하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협력부서인 편집부 기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해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30명 남짓 되는 편집부원들이 얼굴이며 체격이며 말투가 어찌 이리도 비슷비슷할까요.

 

10여 년 만에 하는 야간근무와 휴일근무도 한 달여 지난 이제야 적응했습니다. 일주일에 평균 나흘을 저녁 8시가 넘어 퇴근하니, 좋아하는 저녁 술 모임은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즐거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중 최고는 점심을 먹은 후 누리는 남산 산책입니다. 산허리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개나리들이 손가락을 활짝 펴고 환영해 줍니다. 노란 꽃무리를 지나면 성곽길의 아름다운 풍광에 절로 미소가 터집니다.

 

 

야근하는 날엔 고층 빌딩들이 뿜어내는 화려한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물녘 노을에 물드는 도심 풍경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에 큰 힘이 되어줍니다. 빗속에도 달빛 아래에도 산책을 하는 이유입니다. 며칠 동안 넉넉하게 내린 비에 목련과 진달래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습니다. 수분을 머금은 벚꽃들은 실바람에도 분홍 꽃비를 흩날립니다. 봄은 빗줄기를 타고 자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봄밤엔 왜들 쉽게 잠들지 못할까요. 와인을 마시고, 막걸리를 들이켜고, 양을 천 마리쯤 센 후 동틀 무렵에야 잠이 든다고 합니다. 봄날에 섞여 쉬이 자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음 따뜻해지는 시(詩) 읽기가 최고이지 싶습니다. 이윤학의 시 ‘대문 앞’을 읽습니다.

 

“(…) 뒤로 돌려 손가락 깍지 낀 할머니/ 팔 그네 위에 앉아 잠이 든 아이/대문 앞까지 찾아와/ 환하게 바닥에 깔린/ 햇볕 위에서 할머니/ 느린 스텝을 밟는다/(…)”

 

 

할머니의 체온이 느껴지는 자장가 같은 시입니다. 봄날 할머니 손에 이끌려 산책 나갔다가 할머니의 따뜻한 등에 업혀 돌아오던 어릴 적 기억이 나는 정겨운 시입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 땐 정호승의 ‘봄길’을 펼칩니다. 마음속 걱정, 근심, 집착, 화가 사르르 녹으며 편안해집니다. 스스로 ‘봄길’이 되라고 스스로 ‘사랑’이 되라고 속삭이거든요. 봄길을 걸으며 봄 같은 사람이 되라고 나지막이 말해주거든요.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보라/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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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 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 담당 연구원, 이투데이 교열팀장을 거쳐 현재 한국일보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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