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같은 소설과 '황혼' 만년필[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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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같은 소설과 '황혼' 만년필

2021.01.06

시내의 서점에서 찾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예쁜 책이었습니다. 두툼한 표지에 잘 펼쳐지도록 표지 가장자리에 홈이 들어가 있는 전형적인 고급 양장이었습니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 있어 책을 펼쳐 볼 수 없었지만, 반짝이는 빨간색으로 쓴 작가의 이름과 시무룩한 검정으로 쓴 스페인어 제목은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책을 펼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저녁이었습니다. 마치 새로 들인 만년필에 바로 잉크를 채우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쥐어 보기를 여러 번 한 다음 잉크를 넣는 그런 기분을 내고 싶었습니다. 기대처럼 책은 첫 문장부터 눈에 탁 박혔습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잊힌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려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

잉크 한 모금을 먹여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명기(名器)임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은 느낌 있게 출발하였고, 그 명기들이 마지막 한 글자까지 또렸하게 써지는 것처럼 끝까지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간간이 나오는 만년필에 관한 묘사는 저와 같은 만년필인(萬年筆人)들에겐 봉급보다 더 큰 보너스였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아래의 석 줄이었습니다.

    그것은 만년필들의 여왕인, 번호가 매겨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시리즈로 판매원은 거드름을 피우며 그 만년필의 소유자가 다름아닌 빅토르 위고였다고 장담했다. 그 금촉에서 『레미제라블』의 원고가 탄생했다고도 했다.

빅토르 위고(1802~1885)가 만년필을 썼을까, 하물며 몽블랑을? 실용적인 만년필은 1883년에 등장하고 몽블랑은 1906년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잔뜩 의문을 품고 있는데 작가는 한 장을 넘기자마자 주인공 아버지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합니다.

    “게다가 빅토르 위고 시대에 만년필이 존재했는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사기꾼이 많거든."

입이 꽉 다물어지는 답변입니다. 사실 저는 그 한 장을 넘기는 동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에 실재 했던 만년필 세 자루를 신나게 떠올리고 있었습니다.첫 번째 것은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모델까지 한 콘클린사(Conklin社)의 노잭(NOZAC)입니다. 김소운 선생의 수필 『외투』의 한 대목에 등장하는 그 콘클린입니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프랑스제<콩크링>- 요즘<파카>니 <오터맨>따위는 명함도 못 내놓을 최고급 만년필이다. -수필 외투의 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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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콘클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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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으면 콘클린은 프랑스 회사는 아닙니다. 190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하여 초반 몇 년 동안 더 오래파커나 워터맨을 당황케 한 것은 맞지만 , 파커나 워터맨이 명함을 못 내놓을 정도는 아니었고, 이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의 회사였습니다.

콘클린사의 공로는 만년필에 잉크를 넣을 때 스포이트를 갖고 다닐 필요 없이 만년필 혼자 잉크를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 역시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더 예쁘고 편리한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등장했고 1910년대 후반부터 콘클린은 선두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노잭은 이 콘클린사가 1931년 출시한 것으로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할 요량으로 만든 야심찬 만년필이었습니다.

1930년대 생산된 콘클린 노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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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1929년에 등장한 워터맨사(社)의 귀족이라는 의미를 가진 패트리션(PATRICIAN)입니다. 패트리션 역시 워터맨의 모든 운을 걸고 만들어진 만년필입니다. 워터맨 사는 사업을 시작한 1883년부터 콘클린사가 등장했을 때 잠깐 흔들렸을 뿐 수십 년 간 큰 어려움 없는 안정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딱딱한 펜촉이 유행하면서 파커와 셰퍼가 각광을 받자 워터맨사는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약간 늦긴 했지만 1929년에 승부를 건 만년필이 패트리션입니다.

1929년에 첫 등장한 워터맨 패트리션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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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는 1931년 첫선을 보인 에버샵사(EVERSHARP社)의 도릭(DORIC)입니다. 도릭 역시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태어난 만년필입니다. 원래 필기구 회사가 아니었던 에버샵은 기계식 펜슬(일명 샤프)을 인수하여 재미를 본 후 만년필회사까지 사들여 단숨에 만년필 세계의 선두권에 진입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성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만든 것이 도릭이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세 자루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이 세 자루는 회사를 구했을까요? 성공했다면 몽블랑이 아닌 이 만년필들 중 하나가 소설속에 등장했겠지요. 해가 뉘엿뉘엿 질 때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만들 듯 이 만년필들은 그 회사들의 황혼이었습니다.

1930년대 애버샵 도릭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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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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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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