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성 토목기사 1호’ 손성연 씨앤씨종합건설 대표


터프한 건설업계, 대범하고 섬세하게 여성 신화를 쓰다


   남성의 전유물이자 남성의 일 중에서도 ‘터프한’ 분야로 꼽히는 건설업계에서 30여년 간 몸담으며 CEO로 일한 지 20여년. ‘대한민국 여성 토목기사 1호’ ‘개성공단 진출 여성기업인 1호’ ‘건설기술인 대상 수상’ 등 굵직한 이력이 눈에 띄는 인물, 손성연 씨앤씨종합건설 대표다. <인사이트코리아>가 지난 8월 20일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씨앤씨종합건설 사무실에서 손 대표를 만났다.


손성연 대표.


처음 입사한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남녀차별을 겪은 이후 이직해 ‘남자와 차별대우 받을 만한 상황에선 절대 일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걷는 시간도 아까워 늘 뛰어다녔다는 손성연 대표.


“현장에 나가보면 여자가 남자에 비해 체력이 부족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거친 분야에서도 여성의 경쟁력은 전적으로 필요했다. 위험한 만큼 여성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기획부터 시공, 유지 관리까지 꼼꼼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갈 땐 걸어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뛰어다녔다. 회계 부서에서 수금을 못 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얘길 듣곤 ‘내가 가서 받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시간을 버티고 설득해 결국 돈을 받아온 적도 있다.”




씨앤씨종합건설이 개성공단 사업권 면허를 현대에 이어 두 번째로 취득하게 된 것도 통일부 담당관에게 ‘10분만 내달라’며 직접 만나 설득한 그의 ‘열정적 돌격’ 덕분이었다.



- ‘대한민국 1호 여성 토목기사’로 유명하다. 당시 여성 토목기사는 상상도 못할 때였는데 대단하다.


“당시 여성이 선호하는 전공은 주로 가정과·영문과·간호학과 등 섬세한 성향과 어울리는 분야였고 이공계 쪽에서는 화학이나 생물 등 기초학문 분야였다. 공대 전체에 여학생은 10명 안팎이었으며 토목은 남성들조차도 거친 분야로 인식해 여학생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였다. 건설은 ‘건축’과 ‘토목’이란 두 축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토목은 도로·교량·지하철 등 사회간접자본(SOC·Social Overhead Capital) 등을 건설하는 공사를 총칭한다. 토목기술자를 영어로 ‘Civil Engineer’라고 하는데, ‘Civil’은 곧 ‘민간’이란 뜻이다.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부분, 그것을 하는 것이 토목이다.”


- 고등학생 때는 ‘토목’이란 개념을 잘 몰랐을 것 같은데, 대학입시 때 이쪽 학과로 지원하게 된 동기가 있나.


“명지여고를 나왔다. 지금은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엔 같은 재단 내 대학교를 진학하게 되면 특혜를 주었다.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그때 명지대 토목공학과에 젊은 교수님들이 계셨는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그 분들이 당시로선 보다 깨인 생각을 하셨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토목이 설계와 시공 파트로 나뉘는데, 설계자로 키우려고 했다고 하시더라. 그 전까진 토목을 전공한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여자가 시공 현장에 나가긴 좀 힘들지만 설계는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면서 여성인재를 키워보자는 마음으로 연락하셨다고 들었다.”




- 대학교 생활은 어땠나. 적성에는 맞았나.


“솔직히 말하면 다닐수록 재미가 없었다. 주위에 여자 친구들도 없고 적성에 잘 안 맞는 것 같았다. 3학년 쯤 취업 고민이 됐다. 그때 인생을 5년 단위로 잘라서 계획을 세워봤다. 그랬더니 가장 가까운 25살 목표가 보다 뚜렷해졌다. 일단 목표는 ‘대기업 입사’였다. 그때부터 자격증을 꼭 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목표가 없을 땐 공부를 할 마음도 안 생기더니 목표가 뚜렷해지니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들었다. 토목기사 자격증은 대학 4학년 2학기 때 땄다. 교사자격증처럼 이게 없으면 인정을 못 받는다. 기술자격증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당시엔 ‘기사’가 최고 등급이었다. 4학년 때 따고 나니 취업이 확실히 수월하긴 했다.”


- 목표인 대기업 건설회사에 입사를 하고, 생각보다 일찍 이직했는데 이유가 있었나.


“대학 졸업 직후 모 대기업 건설사에 첫 입사를 했다. 그 회사에서 불합리한 문제점을 직접 겪었다. 그때 나는 남자 직원들과 똑같이 면접보고 들어가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야근도 했는데, 남녀에 따라 급수 차이가 있더라. 남자는 4급에서 시작하는데 여자는 6급부터 시작한다는 회사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승진에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당시 인사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여성들이 많다보니 대졸 여직원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런 사실을 첫 월급을 받고 나서 알았다. 당시 같은 부서에 7명 동기가 신입으로 들어갔는데, 내 월급이 동기 남자직원보다 2만원 적었다. 그때만 해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여직원이 일을 적게 하거나 어떠한 특혜가 있었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그렇지도 않았기에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부분에 대해 회사에 항의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회사가 참 고지식했다. 강하게 투쟁했으나 절대 바뀌지 않더라. 일개 여직원이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답은 내가 다른 회사로 가는 것이었다. 그때 ‘마흔이 되면 무조건 남자 밑에서 일하지 말자’ ‘남자와 차별대우 받을 만한 상황에서 절대 일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대놓고 남녀차별을 하던 시절이었다.”




- 이직한 회사는 어떤 곳이었나.


“이후 남광토건에서 일했다. 그 때 면접을 보는데, 면접 말미에 번쩍 손을 들고 ‘질문 하나 있습니다’라고 했다. 면접관들이 말하라고 하기에 ‘남자와 여자를 차별대우 하나요? 함께 시험을 보고 정당하게 입사한 거라면 똑같이 일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면접관들이 웃으면서 약속을 했다. 몇 십 년 지나 들었던 얘기지만, 그때 면접관들께서 ‘아주 당돌한 녀석이 들어왔다’ ‘뭐가 돼도 될 놈’이라고 말씀했다고 하더라. 입사 후엔 그러한 차별대우를 두 번 다신 받고 싶지 않아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손성연 대표가 시공 현장에서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씨앤씨종합건설


- 특이하게도 설계보다 현장에서 일에 대한 매력을 느끼셨다고 들었다.


“대학 교수님들께선 나를 설계자로 키우고자 하셨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설계가 잘 맞지 않았다. 첫 직장에선 지하철 설계를 했는데, 매일매일 하루 종일 도면과 싸우는 그 작업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이직한 남광토건에서는 시공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정말 신이 나더라. 그때 신림역, 미아역, 동호대교 등을 우리가 시공했는데 갈 때마다 달라진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다. 토목은 규모 자체가 매우 크다. 돈의 단위가 다르다. 700~800억원 연매출을 올린다 치면 평균 한 달에 50억원 이상이 왔다 갔다 한다. 그 당시에도 공사 수주를 했다고 하면 규모가 몇 백억원이었다. 매일 매일이 다이내믹하고 신났다. 그러고 보니 젊고 어릴 땐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좋은 점만 봤던 것 같다. 그때는 남들이 ‘여자가 어떻게 그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어도 힘든 줄 몰랐다. 지금은 조금은 아니까 그때 사람들이 왜 힘든 일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다.”




- 그 당시 여성이 현장에서 관리·감독을 하기엔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인부들과 마찰이 빈번했다. 상부에 보고를 하려면 현장 사진을 찍고 공정체크도 해야 하는데, 일단 내가 가면 인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상스러운 말을 했다. ‘아침부터 여자가 와서 재수가 없다’는 말부터 상상도 못 할 욕설을 계속 하시더라. 지금이야 장비가 좋기라도 하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지 못했다. 현재 북한 정도의 경제 수준이었으니 모든 일을 인력으로 메우는 그런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인부들도 물론 먹고 살려고 일을 하지만 ‘안전’에 대한 우려가 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가정으로 복귀하길 기도하는 거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현장에 와서 왔다 갔다 하니,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뒤에서 욕을 엄청 하는데 그것을 모르는 척 못 들은 척 흘려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땐 참 마음에 큰 상처였다. 자꾸 그런 일을 겪다보니 현장 자체가 무서웠다. 예컨대 지하철 현장을 체크하려면 각도가 직각으로 세워진 쇠사다리를 타고 지하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15m씩 내려갔다가 또 다시 올라오고 반복해야 하니까 나중엔 하도 사다리를 세게 잡아서 손에 물집이 다 잡힐 정도로 긴장이 되고 무서웠다. 물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 체력적인 부분에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남자들에 비해 여성의 체력이 부족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선입견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직접 느낀 것이다. 그러나 거친 분야에서도 여성의 경쟁력은 전적으로 필요했다. 위험한 만큼 여성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기획부터 시공, 유지 관리까지 꼼꼼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8년 정도 쉬었다. 다시 업계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나.


“육아를 하는 동안 잠시 일을 쉴 뿐이지 그만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은 삶의 큰 축이기 때문에 일로서 성취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려고 계속 시도를 했는데 아이들이 떨어지기 싫어해서 빨리 못 돌아갔을 뿐,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다. 그래서 다시 열정을 갖고 직장에 복귀했다.”


- 복귀 이후 업계에서 평판이 굉장히 좋았다고 들었다.


“열심히 한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극성스럽다는 얘기를 들 정도였다(웃음). 남광토건을 다닐 때 얘긴데, 복도에서 ‘다다다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모두가 ‘토목부 손 기사네’라고 했다.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갈 때 걸어서 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걸어가는 그 시간조차 너무 아까워서 뛰어다녔다.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늘 부족했다. 회사 내에선 일 욕심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부장 직급 때의 일인데, 회계 부서에서 수금을 못 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내가 가서 받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을 버티고 설득해서 결국 대금을 받아온 적도 있다. 일에 관해선 굉장히 돌격적인데, 성격은 사실 내성적이다.”


- 직장에 복귀한 이후 건설회사 창업까지 목표를 이루었다.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이 업계가 입소문이 빠르다보니 스카우트를 2차례 받으며 모 중소기업 본부장까지 하게 됐다. ‘본부장’은 토목뿐만 아니라 건축, 인사 등 모든 부분을 아우르면서 챙기는 업무를 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몇 년 있다 보니 ‘회사를 차려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예전부터 내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겁이 났는데, 본부장 업무를 해보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해서 2000년에 씨앤씨종합건설을 창업했다.”



- 회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을 어떻게 하려고 마음먹었나.


“업계에서 일한 지 30여년, 씨앤씨종합건설을 운영한 지 20여년 정도 됐다. 사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버는지 알고 있다. 아파트를 짓고 분양하는 것과 같은 민간사업을 하는 것이 돈을 벌기엔 가장 효과적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회사를 운영하고 싶진 않다. 물론 회사 창업 초기에 그렇게 해봤지만 영 적성에 맞지가 않더라. 반면 국가 공사는 내 성향과 적성에 맞았다. 뿌듯함과 보람도 있다. 지금도 거의 100% 국가 공사만 하고 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이윤추구가 첫 번째 목표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일을 하고자 한다. 돈 벌려고만 생각했으면 일을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돈 생각만 하고 일을 하면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우물만 파고 왔다.”




- 직원들을 뽑을 때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솔직히 정말 뛰어나게 똑똑하고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사람이 중소기업에 오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에 오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식을 내가 선택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늘이 정해주신 것처럼, 우리 회사에 온 직원들 역시 하늘이 맺어준 인연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20여년 간 회사를 운영해오면서 단 한명에게도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여기서 경력을 쌓아 더 큰 회사로 간다고 하면 늘 고마웠다. 우리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좋은 선례가 돼줘서 고마웠다. 가서 잘 크라고 응원해주며 보냈다. 몇몇 임원은 좋은 인재를 영입하고 또 보내고 이런 것들이 유연하게 작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게 쉽게 되지 않더라. 한 번 뽑은 직원은 끝까지 간다. 그래서 직원들을 자주 뽑지는 않는다.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에게 돈을 벌어주려고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과 다름없다.”


손성연 대표.<이원근>


- 씨앤씨종합건설이 개성공단에서 사업권 면허를 딴 2호 기업이라고 들었다.


“개성공단에서 사업 면허를 받은 1호는 현대아산이다. 나는 현대의 하도급을 받는 것 그 이상을 원했다. 그래서 통일부에 면허를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승인이 쉽게 나지 않았다. 결국 통일부 담당 국장께 직접 면담 신청을 했다.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국장과 대화 끝에 2번째로 우리 회사가 개성공단 사업 면허를 받게 됐다. 그 벽을 허물고 나니 이후로 3호, 4호 기업들이 생겨났다. 이후 개성공단 내에 우리나라 입주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업무시설인 입주센터를 짓게 됐는데 규모가 꽤 커서 다른 기업들과 함께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도 ‘내가 견적을 뽑아볼테니 같이 갑시다’라며 금호건설, 남광토건 등 기업들을 모아 시작했다.”




- 개성공단에서의 사업은 어땠나.


“2007년경부터 140여명 북한 직원들과 4년 정도 함께 일했다. 공장을 많이 지었고, 기업지원센터와 호텔 등도 지었다. 그때 몇 주일에 한번 씩 개성공단 공장을 방문하면 ‘사장 선생 오셨냐’고 북한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눈빛만 봐도 반가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현장에선 공사 기간이 모자라 북한 현장반장이 밤을 새면서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을 보는 나도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다. 가뜩이나 비쩍 마른 사람이 더 말라가는 것 같았고. ‘힘들어서 어떡하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대답했던 그 반장의 얼굴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상비약이나 먹을 것을 많이 주고 오고 싶었는데, 북한 법상 그러면 법에 저촉된다고 하더라. 놔둔 것을 그들이 가져가는 것은 괜찮다고 해서, 내 차에 화장품부터 과자, 약 이런 것들을 잔뜩 놔두고 내렸다. 직원들이 알아서 가져갈 수 있게. 그런 한 장면 한 장면이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 30여년 간 한 우물을 파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어떤 것인가.


“일정한 고객이 없고 정해진 일에 대한 반복이 없고. 발주처가 늘 다르고 만들어내야 할 제품 또한 항상 다르다. 무엇보다 제일 힘든 것은 자연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여름에 너무 더울 땐 인부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한다. 공정도 중요하지만 안전사고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 참 걱정이 많았다. 공사 기간이 늘어져서라기보다는 지반이 약해지니 그것 자체가 신경 쓰였다. 사고 우려를 극복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니 심적 스트레스가 많다. 이미 몇 년 전 공사가 다 끝난 사업들도 비가 많이 오거나 하면 항상 염려가 된다. 회사를 운영한 이후엔 현장의 위험성에 더더욱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고, 늘 심장이 떨린다.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늘 걱정이다.”




- 우연찮게 발을 들인 진로가 천직이 됐다.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 다른 일을 했어도 또 그 일에 빠져들었을 것 같긴 하다. 옆을 잘 못 본다. 인맥도 아주 넓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진솔하게 깊은 인연을 맺으려고 한다. 보통 건설회사라고 하면 술 접대가 많은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또 우리 부모님의 딸로서 양심적이고 바른 길로 살아가려고 늘 노력한다.”



-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른 뒤 건설업계 후배들이 ‘손성연 선배, 그분 정말 괜찮은 선배였지’, 이 소리를 꼭 듣고 싶은데 아직 거기까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도와주고 싶다. 또 씨앤씨라는 회사를 통해서 아이들도 공부시키고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이것이 씨앤씨의 모든 열매는 아닌 것 같다. 아직은 사회적 열매가 없는 것 같다. 이게 나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사회적 축을 담당할만한 어떤 열매를 맺어 놓고 일을 그만 둘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좋은 선배, 사회적 열매 이 두 가지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 여성 공학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삶의 계획을 세우라는 것. 설사 계획대로 되지 않을 지라도 어떠한 삶을 살 것이란 계획은 정말 중요하다. 두 번째는 좋은 인맥을 만들자는 것. 그러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하고 좋은 인맥과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실력을 키워라. 실력이라는 것이 꼭 공부만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실력이고 멋들어진 노래를 신나게 부를 수 있는 것도 실력이다. 이 세 가지는 내가 살아보니 꼭 필요하더라. 경험에서 말해 줄 수 있는 삶의 노하우는 이 세 가지를 꼭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손성연 대표

1978~1982 명지대학교 토목공학과 입학·졸업        

1982~1983 남광토건        

1996~1997 청란건설        

1998~2000 세창종합건설       

2000   씨앤씨종합건설 대표이사        

200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설사업 최고 전략과정   

2006   서울지방조달청 표창장 수상        

2007   건설교통부장관 표창        

2012   한국철도협회 제4기 철도산업 CEO과정 수료        

2013   건설산업발전 유공자 표창        

2014   토목·건축기술대상 수상        

2016   검찰총장 표창        

2018   국토교통부장관 표창장        

2020   건설공제조합 대의원        

         대한토목학회 이사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이사   


[인사이트코리아=강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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