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외면한 문상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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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외면한 문상

2020.07.27

2020년 7월 초입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두 사람이 하루 사이에 세상을 떴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이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이 달랐던 만큼이나,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도 달랐다.

두 사람의 죽음은 모든 국민이 애도하는 죽음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분열된 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죽음이었다. 그 때문이었겠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두 사람의 빈소에 조화만을 보냈을 뿐 직접 문상하지는 않았다.

9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시장은 여비서가 성추행 혐의로 자신을 경찰에 고소한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일 타계한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100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박 시장의 사망과 같은 경우를 보통 흉상(凶喪)으로 일컫는다. 죽음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사인에 불미스런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었다면 가족들조차 남에게 알려지길 꺼렸을 죽음이다. 박 시장 가족들이 가족장으로 치르기를 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권여당 출신으로 3선의 현직 서울 시장이었다. 현직을 이유로, 또 시민운동의 대부였다는 이유로, 박 시장의 장례는 서울시 장(葬)이란 억지스런 절차를 거쳐 5일장으로 치러졌다. 대통령을 제외한 많은 정부 여당 인사들이 박 시장의 빈소를 찾아가 문상했다.

서울시청 광장에는 분향소가 마련돼 수많은 사람들이 조의를 표했다. 그런 방식의 장례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이틀 사이에 50만 명을 넘었다곤 해도, 박 시장의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롭지는 않을 듯했다.

백 장군은 6·25 때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국군에게 반격의 발판을 만든 구국의 영웅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전공(戰功)은 나라의 기틀에 관한 것이므로, 국민 모두로부터 추모를 받아야 함이 옳다.

1964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죽었을 때 미국은 국장(國葬)으로 그를 추모했다. 맥아더 장군과 함께 6·25전쟁을 지휘한 대한민국의 군인 가운데 국장으로 추모할 대상자가 있었다면 아마도 백 장군이 유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젊은 날 일본군 복무 전력이 평생토록 친일의 굴레가 되었다.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 2년간 그가 초급장교로 복무했던 만주의 일본군 부대가 항일군(한인이 포함된) 토벌대였다는 것이 악행의 구체적 증거도 없는 그에게 씌워진 친일민족반역의 굴레였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태어나 일제의 장교가 되려고 군에 지원했으므로 친일반역이 된 것이다. 유신 시절 장교가 됐으므로 유신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투입된 초급장교를 학살 주범이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논리이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부터 현충원 안장에 반대하던 세력들의 목소리가 그의 죽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탓인지, 그는 결국 육군 장(葬)으로,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국장 또는 국군장으로, 장지도 서울 동작동 현충원으로 해달라는 목소리는 묵살됐다.

정부 여당 측 인사들이 줄줄이 박 시장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사법연수원 동기생 인연을 되새기며 그를 애도했다. 그러나 백 장군의 죽음에는 청와대도, 민주당도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안장이 끝나자마자 대전 현충원 홈페이지 안장자 정보의 비고란에 친일행적을 적어 넣었다. 국가가 외면한 그를 위한 분향소를 서울 광화문 등 전국도처에 설치했던 시민단체들은 자치단체로부터 공유지 불법점유에 따른 벌금통지를 받았다. 법을 빙자한 심술 같았다.  

문 대통령이 두 사람의 장례에 직접 문상을 하지 않은 이유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 박 시장의 죽음이 흉상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이 문상을 가기엔 어색함이 있다. 대통령이 박 시장의 빈소를 찾지 않았는데 백 장군의 빈소를 찾는 것은 그나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둘째 백 장군의 친일행적은 박 시장의 흉상 이상으로 문 대통령의 문상을 하지 않을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군 장교였으므로 친일이라는 사람들에게 친일 행적의 근거를 따지는 것이나, 6·25의 전공과 친일의 무게를 비교하는 따위는 애초에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6·25 전쟁 자체에 관한 인식의 차이다. 백 장군의 6·25 공적은 동족을 향해 총을 쏜 결과일 뿐이라는 게 현 집권세력의 대체적인 인식인 듯하다. 그런 생각은 필히 백 장군에 대한 추모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남북대화를 저해한다는 생각으로 발전됐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유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문 대통령의 도량의 문제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남북대화를 위해 6·25의 원인이나 책임조차 잊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하다. 과거를 잊은 백성은 반드시 과거를 되풀이한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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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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