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조용한 반란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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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조용한 반란

2020.04.24

우리나라 지하철은 쾌적하고 능률적인 것으로 이용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들도 만족해하고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노선에 따라 편차가 있겠으나 최근에 건설한 노선들은 승강장이 넓고 편리하며 역사(驛舍)의 공간들이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장식돼 있습니다. 최근의 노선 하나를 건설하는 책임을 맡았던 한 지인으로부터 그 노선을 잘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들였는지를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과 정성이 투입되었기에 최근 노선들이 훌륭하게 건설되었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지하철은 매우 우수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하철 이용에 있어 몇 가지 문제점도 있습니다.

지하철에 오르면 우선 시야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핑크색 임산부석입니다. 그 자리는 거의 비어 있고 임산부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한 객차당 4~6개 정도가 있는데 가끔 사람이 앉아 있기는 하지만 임산부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른 이들만큼 눈치를 덜 보는 연세 있는 아주머니들이 요새 무슨 임산부가 있다고 아까운 자리를 비워 놓나, 하면서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 말이 맞습니다. 초저출산 운운하면서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데도 출산율이 증가되기는커녕 하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임산부 보호, 크게는 출산장려의 일환으로 임산부 배려석을 만들어 놓았으며 이를 매우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 앞에는 '임산부석 비워놓기' 배너를 세워놓고 캠페인을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착상을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내놓았을 것이며 여성 인권 향상이란 좋은 생각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곱 개 좌석 중 양 끝을 핑크색으로 구별해 놓은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앞 공간도 온통 핑크빛으로 칠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기 인형까지 올려 놓았는데 때가 꼬깃꼬깃 묻어 미관상으로도 위생상으로도 좋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걸 바라보면서 정작 앉고 싶은 사람들이 못 앉는 이런 왜곡된 현상이 우리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도 승객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아까운 자리를 비워 놓고 있는 것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현실에 맞지 않고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은 오래 못 가는 모양입니다. 언제부턴가 그 핑크색 금단의 자리에 아무나 앉는 현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주변에 임산부가 없다 싶으면 크게 눈치를 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습니다. 물론 임산부가 타면 언제라도 양보하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느 날 한번은 양쪽 끝 자리 임산부석에 남성 하나, 임산부가 아닌 여성 하나가 각각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흘러나오는 임산부 배려석 비워놓기 방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는 승객들이 지하철 당국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맞지 않는 일을 자연스레 바로잡는 조용한 반란입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나 교양 수준으로 보아 그런 특별 배려석이 없다고 하더라도 임산부를 보고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번에 큰 난리를 겪고 있는 코로나 19 사태에서 드러난 우리 국민의 시민의식이라면 드러나게 임산부석을 만들어 놓고 방송이나 캠페인을 하지 않아도 임산부에게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정도 캠페인을 했으니 이제는 그만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량당 한두 석 정도만 남겨 놓고 나머지 좌석은 다 일반석으로 환원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규율을 유지함으써 오히려 준법의식이 흐려질 우려가 있음도 고려해야 합니다. 승객의 자연스러운 반란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우수한 지하철 시스템이지만 승객의 편의를 위해 한두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난 다음에는 내릴 역을 바로 알고 내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가끔은 지하철 객차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역 이름을 확인하려는데 역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아 당황하다가 내릴 역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릴 역은 방송으로도 나오고 요즘은 디지털 안내판이 좋아서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돼 있지만 차 안이 매우 혼잡하면 방송도 안 들리고 디지털 안내판도 잘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바깥에 써 붙여 놓은 역 이름을 보고 확인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외국의 경우에 비해 역사 내 역 이름 표시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지하철 당국은 승객의 입장에서 모든 역을 꼼꼼히 살펴서 역 이름 표지를 더 보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내려서 출구를 찾아가는 데도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크고 복잡한 역에서는 꽤 많이 걸어야 바른 출구를 찾아서 나갈 수 있는데 중간중간에 표지가 안 보여 당황하거나 다른 표지가 끼어들어서 혼선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다 보면 표지의 글자들이 비교적 작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역사 내 제반 표지는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승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므로 실용성을 앞세워 이 부분을 더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의 경우 고속터미널역과 서울역에서 해당 출구를 잘 못 찾아 당황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늘 이용하는 사람들은 역사 내 지리에 익숙하므로 안내표지 문제로 불편을 느끼지 않겠지만 가끔 이용하는 사람들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더 신경을 써 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문제점은 대강 그 정도로 하고, 전보다 크게 개선된 점을 하나 들라면 저는 지하철 역사의 청결 상태, 특히 화장실의 청결을 들겠습니다. 백 퍼센트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어느 지하철 역사의 화장실에 들어가도 항상 깨끗하게 유지돼 있어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어느 날 밤 11시쯤 어떤 역사의 화장실엘 들렀는데 그때까지도 물과 세제로 깨끗하게 씻어내는 아주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니 화장실이든 역사 내 다른 공간이든 깨끗하지 않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분들뿐 아니라 지하철이라는 대중 교통시설이 잘 돌아가게끔 운행하고 유지해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나라 사회가 지하철 역사의 청결을 유지해주는 분들만큼 각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나간다면 일등 선진국이 될 날이 머지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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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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