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와 한국..."'사법개혁’으로 독재 굳힌다"

'사법개혁’으로 독재 굳힌다, 폴란드와 한국

[김순덕의 도발]

    지난주 유엔총회 막간에 폴란드와 정상회담이 있었다. 우리 대통령은 쇼팽 서거 170주년 콘서트를 언급하며 “한국이 폴란드 음악과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고 했고, 폴란드 대통령은 한국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연주 실력을 칭찬했다(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행사여서 기사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유엔총회에서 평화를 극구 강조했던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절제된 검찰권 행사가 중요하다”는 첫 메시지를 내놨다. 귀국 첫 마디가 이럴 정도면, 분기탱천했다는 얘기다. 이 절제된 발언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다. 고마 해라, 조국 수사.



법무장관-검찰총장 겸직을 시켜버려?
폴란드 같으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을 수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대통령 명을 받는 법무장관이 아예 검찰총장직을 겸직하도록 ‘사법개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유엔총회까지 가서 일본도 아니고, 중국이나 러시아도 아닌 폴란드 정상을 만난다기에 뭐 쓸 게 없나 찾아보다 알게 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양자회담장에서 열린 한-폴란드 정상회담에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2019.09.23. 청와대사진기자단

놀랍게도 폴란드에선 우리나라 뺨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폴란드는 2015년 정권 교체 후 법치를 파괴하는 사법개혁을 계속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② 적폐청산의 일환이라는 폴란드 사법개혁은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이 나라 지정학적 역사, 최고 실세의 개인적 수난사와 관련이 깊다.

③ 실세의 아바타, 검찰총장을 둘러싸고 최악의 스캔들이 터진 상태에서 10월 13일 총선은 성공할 수 있을까.

사법개혁이라고 다 개혁이 아니다
28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정문 앞에선 두 개의 세계관 충돌이 벌어졌다. 조국 수호 집회 측에선 조국 수사와 관련 보도가 적폐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이 정부의 검찰개혁을 주장한다. 



조국 사퇴 집회 측은 정반대다. 검찰총장이 잘하고 있다며 검찰이 정치권력의 눈치 안 보고 제대로 수사해 법치를 수호하는 것이 검찰개혁이라는 주장이다.

2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조국 법무장관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과 윤석렬 검찰총장이 근무하는 대검찰청 정문 앞 도로에서 ‘조국 사퇴’집회와 ‘조국수호’집회가 함께 열렸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개혁이라고 다 개혁이 아니다. 정부안대로 공수처가 설치돼 있다면, 그 공수처는 조국 아닌 윤석열을 잡아갈 것이 뻔하다고 본다. 전직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법관도 잘만 구속하면서 유독 제 식구들만 봐주는 집단이 검찰이다. 그런 검찰을 장악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검찰을 기소하는 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공수처다(거칠게 말하면).



정권의 세퍼드가 감히 주인을 물어? 폴란드는 정권 교체 석 달 만에 입마개를 채워버렸다. 2016년 1월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을 겸직하게 만든 것이다. 여당인 법과정의당(Pis)은 미국도 그렇게 돼 있다며 야당 반대에 눈 하나 깜짝 않고 한밤중에 통과시켜 버렸다(그러나 미국서 연방검찰 아닌 주 검찰총장과 지방검사장은 선거로 뽑히기에 차원이 다르다). 폴란드는 지금 정권의 세퍼드, 즈비그뉴 지오브로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과 법치 수호 편에 선 법관들이 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치열한 전쟁 중이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 정권이 필요한 것
4년 전인 2015년 10월. 우파 민족주의 정당 Pis가 총선에 승리했다. 5월 안제이 두다라는 43세의 참신한 대통령 후보로 대선 승리를 차지한 데 이은 8년 만의 재집권이다(이 나라는 대통령에게 법률거부권 정도만 부여한 이원집정부제다). 청년일자리 120만개, 최저임금 인상과 육아수당, 폴란드 우선의 자주외교 공약 등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새 얼굴의 대통령, 총리를 내세워 집권한 뒤 Pis의 통치방식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책의 공식과 거의 일치한다. 미디어와 사법부를 포획하고, 경쟁자들을 밀어내며, 룰을 새롭게 씀으로써 영구집권을 꾀하는 것이다.

킹 메이커인 Pis 대표 자슬로프 카진스키 의원에게 정권은 수단이다. “그는 나라를 바꾸기 위해 당과 정부를 원한 것”이라고 2016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한 바 있다. 1989년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폴란드가 걸어온 길이 죄다 잘못됐다는 거다(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카진스키의 개인사와 결부된 폴란드 과거청산 작업은 다음에 쓴다).

즈비그뉴 지오브로 폴란드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사법 독립의 원칙’ 침해는 안 된다
지금 Pis 정부가 사력을 다하는 것이 사법개혁(judicial reform)이다. 여기도 말은 개혁인데 속뜻이 행정부의 사법부 장악이면 과연 개혁이랄 수 있는지, 나는 답답한 것이다. 2017년 영국 BBC는 “폴란드 국민의 81%가 사법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여당 개혁안에 찬성하느냐’는 설문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폴란드 집권세력은 헌법재판소가 정부 추진 법안에 위헌판결 내리기 어렵게 헌재법을 고친 데 이어, 온갖 편법으로 대법원장을 바꾸는 등 사법부에 자기 사람들을 꽂아놓았다. 그리고도 의회(그러니까 집권당을 말한다)가 사실상 판사들을 임명하게 만드는 식의 개혁을 밀어붙여 판사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상태다.

여기서 잠깐. 이 정도의 사법개혁은 우리나라에선 이미 완수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재든 대법원이든 대통령은 국회 동의 없이 색깔을 바꿔 버렸다. 이제 검찰만 장악하면 되는데 조국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일이 꼬인 셈이다. 폴란드에 대해선 유럽연합의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는 6월 24일 “폴란드의 사법개혁이 사법독립의 원칙을 침해했다”고 명확히 판결을 내렸다. 그럼 우리는?



국제사회가 지켜보는 폴란드, 한국은?
ECJ는 “외부로부터 모든 간섭과 압력으로부터의 판사의 독립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대법관 임명부터 집권세력이 좌우하는 건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돼 있는데, 그것부터 잘못됐다는 얘기다.

요즘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이 끌고 가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폴란드와 막상막하인 헝가리가 헌법을 고쳐 권위주의 체제로 갔다면, 폴란드는 개헌 없이 몰아붙여 ‘헌정적 쿠데타’라는 평가까지 나왔다(그런데 유시민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해 “총칼은 안 들었으나 위헌적 쿠데타나 마찬가지”라니 웃기는 짬뽕이다).



실세 카진스키가 이토록 사법개혁을 밀어붙이는 건 10년 전 사법부에서 막힌 ‘국가 개조’ 실패 때문이다. 2010년 쌍둥이 동생이자 대통령인 레흐 카진스키가 러시아 땅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진 뒤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이 얘기 역시 다음에 쓸 예정이다).

그나마 폴란드는 EU처럼 “그건 사법개혁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국제사회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외쳐야 할 판이다. “그건 검찰개혁이 아니다!”
김순덕 dobal@donga.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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