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삭, 배 이야기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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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삭, 배 이야기

2019.09.17

커티삭(Cutty Sark)을 술 이름으로만 아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나 동명의 스카치 위스키가 나오기에 전인 19세기 후반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차(茶)를 운반할 목적으로 건조된 쾌속 범선(clipper)의 이름입니다. 철제 골격에 나무를 덧붙여 만들어진 당시 제일 빠른 무역선이었습니다. 이 종류 배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커티삭호는 현재 영국 런던 인근 그리니치 템스강가 육상에 거치되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전성기 활발했던 해상 무역활동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배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1869년 런던의 해운업자 존 윌리스(1817~1899)의 발주로 건조되었습니다. 본인이 선장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를 운반하는 선박을 여러 차례 운항했던 윌리스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습니다. 영국 내 중국차의 인기와 선주가 스코틀랜드 사람이라는 두 가지는 커티삭의 배경과 이름을 설명하고, 수에즈 운하와 동갑이었던 것이 배의 우여곡절에 영향을 미칩니다.

19세기 들어 영국인들에게 차 마시기가 일상이었는데, 차가 처음 영국에 보급된 것은 17세기 후반 영국의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개막한 바스쿠 다 가마, 마젤란 등 항해가들 덕에 이베리아 반도 끝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한때 무역대국으로 번성했습니다. 인도, 동남아 지역에서 나는 후추, 계피 등 향신료와 더불어 중국의 차도 포르투갈에 소개되었지요. 포르투갈 공주에 의해 소개된 차는 18세기 영국의 상류층에 널리 퍼져 일상화됩니다. 그 사이 네덜란드가 해상 무역의 패권국이 되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유럽과 중국, 일본 간의 무역을 장악하며 영국에 차를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영국 정부가 수입되는 차에 112%의 높은 관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값이 비싸 주로 밀수를 통해 수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82년 영국 정부가 자국 동인도 회사의 차 수입 독점을 지원하기 위해 관세를 12.5%로 낮추며 상황이 달라집니다. 공급이 늘며 차 가격이 크게 떨어지자 차는 일반 대중의 기호품이 됩니다. 당시 벌어진 금주운동(Temperance Movement)이 술 대신 차를 권장해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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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커티삭(1872), 프레데릭 터드게이의 그림. (우) 그리니치 템스 강가에 거치된 커티삭의 갑판에 선 필자(2019.8)

선명(船名)인 커티삭은 원래 ‘짧은 여자 속치마’라는 뜻입니다. 건조될 당시 인기가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유명 시인의 시 내용 중 젊은 마녀가 이 옷만 입고 춤추는 대목이 있는데 선주 윌리스가 이를 보고 배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1870년 2월 15일 27명의 선원과 맥주, 와인과 잡화를 실은 커티삭은 상하이로 첫 항해에 나서고 8개월 후 약 600톤이 넘는 차를 가득 싣고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기에는 인도에서도 차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중국과의 차 무역의 독점권을 잃자, 중국서 옮겨온 차나무와 지역의 토종 차나무로 인도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여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 시대 산업화와 식민지 무역으로 부유해진 시민들은 원산지 중국에서 생산된 차를 선호했습니다.

특히 매해 첫 수확한 차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 이를 영국으로 가져오면 높은 웃돈이 지급되었고 선박들 간 경쟁(Tea race라 불렸음)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새로이 생산되는 햇포도주, 보졸레 누보가 인기가 높은 것과 비슷했던 거지요. 이런 경쟁이 커티삭과 같은 쾌속 범선이 건조되었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1866년 경주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해 5월 중국의 푸저우(福州) 항에서 거의 동시에 다섯 척의 선박이 영국을 향해 출발했는데 남중국해, 인도양,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여 약 1만 5천 마일을 99일 간 항해한 후 두 척의 범선(Ariel호와 Taeping호)이 거의 동시에 영국 연안에 도착했고 20분 차이로 런던과 인근의 항구에서 싣고 온 차 화물을 하역했습니다. 첫 선박의 차에 주어지던 상금은 정확히 기준이 되는 항구가 명시되지 않았던 연유로 두 배가 합의하여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커티삭은 1877년까지 중국에서 차를 운반하다 그 후 정해진 일정 없이 다양한 종류의 화물을 아무 행선지로나 운반하는 일종의 잡화 수송선으로 쓰입니다. 역할이 바뀐 데에는 수에즈 운하 개통과 증기선의 발달이 원인이었습니다. 초기 증기선은 연로로 쓰는 석탄을 많이 실어야 해서 풍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쾌속 범선에 비해 화물 선적공간이 부족해 경제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증기 엔진이 더 효율화되고 커티삭 진수 5일 전에 개통된 수에즈 운하가 결국 쾌속 범선의 우위를 무너뜨립니다. 중국에서 수에즈 운하, 지중해를 이용해 영국으로 가는 항로는 기존 인도양-아프리카 항로에서 약 3천 3백 마일, 날 수로 10~12일을 줄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운하와 지중해의 풍향(風向) 때문에 범선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커티삭이 취항한 1870년에 59척의 범선이 중국을 오갔는데 1877년에는 9척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요즘 컨테이너 선은 약 한 달이면 이 항로로 영국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커티삭은 1883년부터 1895년까지 호주에서 영국으로 양모(羊毛)를 수송하는 일을 합니다. 영국에서 출발해 호주의 동해안 시드니 항구에서 양모를 싣고 남태평양, 남미 대륙 남단을 지나 대서양을 북진해 영국에 도착하는 그야말로 세계일주의 긴 항로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양모 운반선으로 투입된 첫 항해에서 시드니에서 런던까지 84일 만에 도착하는 기록을 수립했는데 이는 다른 배들보다 24일이나 빠른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1895년 커티삭은 포르투갈 해운사에 팔려 포르투갈 이름의 화물선이 됩니다.1922년 수리를 위해 영국의 팰머스 항구에 들어왔을 때 우연히 조우한 선장 출신 사업가 도우먼이 이 포르투갈 화물선이 원래 커티삭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는 자금을 모아 포르투갈로 가 배를 매입한 후 영국까지 예인해와 커티삭이 드디어 영국 선적과 선명을 회복합니다. 그 후 배는 선원 훈련용으로 개조되어 사용됩니다. 배의 사연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관심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마침 새로운 스카치 위스키를 출시한 회사에서 커티삭을 술의 이름으로 정하였습니다.

도우먼 사후 그의 부인이 배를 그리니치 해양대학에 기증했고, 시간이 지나며 커티삭의 상징성을 높이 평가한 국립해양박물관 관장의 노력으로 역사적 유물로 특별히 인정받게 되었고, 1957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석한 공식 행사 이후 일반 방문객에 개방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수리에도 불구하고 선체가 구조적으로 약해지자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마친 후 육상에 거치되어 역사적 기념관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습니다.

커티삭이 있는 그리니치에서 30분 정도 템스 강을 거슬러 가면 영국 의회 건물이 나오는데 작금 이곳에서는 영국의 EU탈퇴를 둘러싸고 파국을 무릅쓰며 전례없는 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식민지에 의존했던 제국주의 시대 이후 세계사 흐름을 감안하면 영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대외 지향적 강한 국가가 아닌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합리적 토론보다는 배타적이고 허위와 과장으로 점철되었던 BREXIT 국민투표 이후 근대 민주주의 종주국이 맞나 싶게 국가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어쩌면 화무십일홍이라는 탄식이 어울리는 현실은 나라나 좋은 제도의 명운도 덧없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좋은 제도를 잘 지키려는 노력이 없으면 더욱 그러할 듯합니다.

 에필로그
커티삭이 등장하기 이전 청나라가 영국으로부터 수입할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여 영국이 일방적으로 차와 비단을 청나라로부터 수입하면서 발생한 무역역조와 수입 대금 지급으로 인한 은의 유출, 그리고 영국이 이를 시정하려고 식민지였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재배한 양귀비로 아편을 생산하여 중국에 수출하면서 발생한 아편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은 다루지 않았음. 필자의 2019년 1웙 15일 자유칼럼 ‘21세기 판 아편전쟁’이 이런 내용을 부분적으로 다루었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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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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