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을 부세요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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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을 부세요

2019.09.04

삭풍은 나모 긋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대
만리 변성(萬里 邊城)에 일장검(一丈劍) 집고 셔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거시 업셰라

세종임금 시대에 육진(六鎭)을 개척했던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시조입니다. 진취적이고 호방한 기상이 두드러집니다. 핵심 단어인 긴 파람 큰 한소리에서 파람은 휘파람의 옛말입니다. 한자로는 長嘯(장소)라고 하더군요.

휘파람은 옛 글에 아주 많이 나오는데, 오늘날 우리가 흔히 부는 그 휘파람과 같은 말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긴 파람 큰 한소리라면 평범한 휘파람이 아니라 뭔가 울림이 더 크고 긴, 다른 소리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長嘯에는 길게 부는 휘파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소리를 길게 빼어 시나 노래를 읊조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 ‘부벽루’ 중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장소의풍등 산청강자류)를 “바람 부는 돌다리에 기대어 길게 시를 읊조리노라니, 산은 푸르고 강물 또한 제대로 흐르는구나.”라고 번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게 휘파람 불며 돌계단에 기대어 있으니,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저절로 흐른다.”고 옮긴 사람도 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친구들에게 “자네들은 벼슬길에 나가면 자사나 태수쯤은 될 수 있을 걸세”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러면 자네는?” 하고 되묻자 제갈량은 그저 무릎을 쓸면서 길게 읊습니다. 제갈량은 벼슬하기 전에 ‘양보음(梁甫吟)’을 지어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다 해서 이를 포슬음(抱膝吟)이라고 합니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君不見隆中長嘯一布衣 歲晩龍翔扶漢基’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융중에서 휘파람 불던 포의가/저물녘에 용처럼 날아 漢나라 기업을 붙든 것을”이라고 해석하고, 제갈량의 포슬음에 대해 ‘무릎을 안고 휘파람을 길게 부는 것’[抱膝長嘯]으로 풀이한 글이 있습니다.

왕유(王維)의 유명한 시 ‘죽리관(竹里館)’ 중 ‘彈琴復長嘯’에 대해서도 거문고 뜯다가 다시 시를 읊조린다, 거문고 뜯다가 다시 휘파람 분다는 해석이 엇갈립니다. “여기 나오는 長嘯는 길게 휘파람을 분다는 뜻으로, 대나무숲에서 일어나는 거문고소리와 휘파람소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처럼 자연의 소리와 일치하며, 그 속에 있는 사람 역시 달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해설이 그럴듯합니다.

장소가 길고 큰 소리(또는 휘파람)라면 서소(舒嘯)는 ‘느직이 휘파람을 붊. 조용히 시가를 읊조림. 한가로이 풍월을 즐기는 일’이라니 좀 낮고 은근한 느낌을 줍니다.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登東皋而舒嘯 臨淸流而賦詩’,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고 읊은 이후, 舒嘯는 중요한 시어가 됐습니다. 老去蠹魚無處用 有時舒嘯立蒼茫(늙어 가매 책벌레는 아무 쓸데가 없어/ 때로 길이 휘파람 불며 쓸쓸히 섰노라(목은 이색의 ‘卽事’), 千年漭不回 臨風忽舒嘯 頫仰一悠哉(한 번 지난 세월은 아니 돌아와 /바람 쏘이면서 휘파람 불며/하늘 땅 둘러보니 유유하기만(다산 정약용의 ‘백운대에 올라’) 이런 것들.

舒嘯를 ‘한숨을 쉰다’는 뜻으로 쓴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문인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서소기(舒嘯記)’는 “짐을 짊어지고 길을 가던 사람이 무거운 짐을 풀어놓고 ‘후유!’ 하고 한숨을 돌린다. 지팡이를 짚고 비탈진 고개를 오르던 사람이 평탄한 곳에 이르러 ‘후유!’하고 한숨을 돌린다. 그동안 쌓인 노고를 이미 마치고 시원하게 한숨을 내쉬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소리가 확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요즈음 시골 풍속에 이른바 ‘한숨을 내쉰다[舒嘯]’는 것이 모두 이렇다고 하겠다.”고 시작됩니다. 27년간 유배생활을 해 서민들의 삶을 잘 아는 사람다운 글입니다.

휘파람은 입술을 오므리고 호흡에 의해 피리와 비슷한 음을 내는 것입니다. 중국어로는 口哨(구초), 일본어로는 口笛(くちぶえ, 구적)이라고 합니다. 哨는 호루라기, 笛은 피리이니 휘파람은 확실히 “박수 등과 더불어 인체를 이용한 악기로, 실제 악기 발명의 실마리가 된다”는 풀이가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왜 휘파람을 불까? 휘파람은 흥과 득의와 호기, 과시이면서 초연(超然)과 독락(獨樂)의 소리이자 음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왜 휘파람은 주로 남자들이 부는 걸까? 휘파람은 회유와 선동, 유혹, 일본말로 히야카시(ひやかし)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석가모니도 세종대왕도 다 휘파람을 불었을까? 다른 분들은 몰라도 예수님은 불었을 것 같지 않나요? 성경에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救贖)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스가랴 10:8)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원래 휘파람을 즐겨 불었습니다. 양 손가락을 입에 넣거나 아랫입술을 손으로 오므린 뒤 숨을 내쉬거나 들이마셔 휘익 하고 소리를 내는 천박한(!) 짓은 원래 하지 못했지만, 혀를 이용해 색다른 소리를 내곤 했지요. 그런데 10개월 가까운 임플란트 시술이 마무리된 지금, 나는 휘파람을 잘 불지 못합니다. 이가 너무 촘촘해져서인지 바람과 숨이 들고 나는 소리의 생산이 여의치 않습니다.

갑자기 장애인이나 불구가 된 느낌, 교통약자라는 말을 차용하면 휘파람약자가 된 기분, 주요한 신체 기능이 없어진 듯한 상실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특히 날숨보다 들숨으로 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하니 아쉽고 안타까움을 지나 슬프기까지 합니다.

연습을 하면 소리가 나려나? 나는 단소를 좀 불었지만, 그것도 오랜만에 입을 대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한참 불어야 겨우 소리가 납니다. 휘파람 연습을 하다가 이학규의 글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무천(茂川) 서생(徐生)이라는 사람은 집에 ‘한숨을 내쉰다’는 뜻의 ‘서소(舒嘯)’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데다 어머니와 여러 자매의 자녀와 조카들까지 먹여 살리느라 갖은 고생을 다 했고, 지금도 분주한 저자거리에서 논밭이나 비단, 곡물을 매매하는 기록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매일 집에 이르러 문 앞에 서면 아홉 차례나 꺾어진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가다가 평탄한 곳을 만난 것처럼 상쾌하고, 방안에 누워 쉬고 있으면 만 근이나 되는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날아오를 듯해 저도 모르게 ‘후유!’하고 한숨을 쉰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은 이름입니다.

후유, 나도 일단 장소는 바라지 말고 서소라도 짧게 간간이 하면서 살아보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치아에 확실히 적응하게 되면 언젠가 휘파람이 나오겠지요. 후유, 글을 겨우 마무리하면서 휘파람 대신 이런 한숨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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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손들지 않는 기자들‘,‘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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