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보하는 한국의 양심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양심을 개인 이익 아래 둬선 안돼
정권 관계없는 상식의 틀 남겨야
불법 아니라고 당당할 수 있다면
기득권 세력의 편법이 판 치게 돼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조국 인사청문회에서 진실이 의미가 없어졌다. 비난하는 쪽이나 반박하는 쪽이나 서로 ‘진실’(fact)을 외친다. 하지만 더는 진실에 관심이 없다. 편을 갈라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목표 뿐이다. 말꼬리를 잡고, 약점을 후벼 파고, 상대측의 신뢰를 공격한다.



조 후보가 임명되고 말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공동체가 공유하는 상식,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되는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됐다.

사회적 비난을 받는 행동을 두고 정치권이 수시로 공방을 벌이다 보니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인지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이번에도 야당 정치인들은 ‘조로남불’이라고 한다. 조국 후보의 과거 글을 들추어 언행 불일치를 꼬집는다. 그게 어디 조국 후보만의 일인가. 젊은이들의 눈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가진 자, 기득권자들의 야바위판이다.



불과 3년 전 현 야당 세력에 분노해 촛불을 들었다. 그때 함께 날 선 비판을 하던 사람들이 똑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기에 좌절감은 더 크다. 조국 후보만의 잘못이라면 그에게 실망하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그런데 떼로 나서 ‘뭐가 잘못이냐’고 조롱한다. 불공정한 학사 관리, 장학금 지급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나무란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했던 정유라의 심보와 다를 게 없다.

대통령 아들까지 나서 유명인을 부모로 둔 ‘고통’이니 참으라고 동정론을 편다. 입시 부정에 밀려나고, 자격을 갖추고도 장학금을 못 받아 ‘알바’로 벌어야 하는 학생들의 설움에 소금을 뿌리는 짓이다. 자신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조국만큼 모든 걸 가질 수 없었던 기자들’의 시기심이 문제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에 접근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 깊은 상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로 들린다. 내가 쓰지 않은 논문의 저자로 올려 입시에 이용하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장학금을 가로채는 일을 기회만 있었으면 누구나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기회가 있어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이 한순간에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조 후보를 둘러싼 의혹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수사 기관이 아닌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런 수준일 수밖에 없다. 공직을 검증하는데 법률 위반만 따지는 건 아니다. 불법 행위는 청문이 아니라 수사 대상이다. 이 정부 들어 낙마한 장관 후보들도 불법행위는 없었다. 그렇지만 사과하고 물러났다.



불법이 아니니 당당하다면 가진 자, 기득권자의 편법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 공직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에 그들의 욕망을 자제시킬 수 있었다. 윤리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너는 깨끗하냐’거나 언론에 ‘네가 못 가졌다고 시기하지 마라’고 반박하는 건 기득권자의 상투적 수법이다.

특권을 가지기로 말하면 보수정치인이 더 많다. 과거 현 야권 인사들을 비판했던 그들의 마음속에 ‘부러움을 못 이긴 질투’가 감춰져 있었다는 말인가. 앞으로 기득권에 대한 비판은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정치인들이 어떤 생각이었건 일반 국민의 마음속에는 시기·질투보다 올바름에 대한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



정권 교체가 반복되면서 기대했다. 여야 정치인들이 국정 운영의 경험을 가지면 책임감을 공유하지 않겠느냐고. 국정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면 국회 활동도 좀 더 생산적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책임의 공유가 아니라 ‘무책임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집권한 뒤에도 과거 정부의 탓만 한다. 임기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생각에 먼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정말 암울하다.

정치인이야 그렇다고 치자. 시민들도 그들의 선동에 따라 진영화 돼간다. 객관적 판단 기준은 사라지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 시민단체와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다. 사안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어느 편이냐부터 따진다. 전문가가 인정받지 못한다. 원로도 필요 없다. 진지한 토론은 사라지고, 댓글 전투만 난무한다. 댓글 부대가 국정의 방향을 흔든다.



87년 체제가 출범하기 전에는 ‘재야 양심세력’이라는 말이 있었다. 정치적 이해에서 초연한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권력자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87년 정치권에 편입되면서 정치적 이해에서 독립된 양심세력이 사라졌다. 사회 원로도 정파적이거나, ‘적폐’로 몰려 힘을 잃었다. 시민단체는 과거의 양심세력과는 거리가 멀다. 정계 입문의 샛길이 되었다.

양심의 공감대는 있어야 한다. ‘낡은 관행’을 뒤집는 과정에 도덕적 기준이 바뀔 수 있다. 그렇지만 양심을 개인과 집단의 이익 아래에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떤 정권에서건 잘못한 일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사과하는 상식의 틀은 남겨놓아야 한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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