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어를 노크하는 산사의 비꽃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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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를 노크하는 산사의 비꽃

2019.08.27

산을 오른 지 꽤 됐습니다. 이달 초엔 기상청의 소나기 예보를 듣고도 수락산을 올랐습니다. 평상시엔 산행객이 너무도 많아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오르던 그곳을 옆지기와 둘이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산사(山寺)가 가까워지면서 그윽한 범종 소리까지 버무려졌지요. “쏴아아~ 데엥~데엥~ 쪼로롱 쪼로롱~ 데엥~데엥~” 
도안사에 도착하자 후두둑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그이 겸 가쁜 숨을 돌릴 요량으로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비꽃을 구경했습니다. 비꽃은 시골집 마당에서 보는 게 예쁩니다. 유리창에도, 손등에도, 꽃잎에도 비꽃은 피어납니다. 절집 마당에서 본 비꽃은 참으로 우아했습니다.

비꽃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말합니다. 빗방울이 바닥에 닿아 퍼지는 모습이 꽃을 닮아 생긴 말이지요. 그런데 비꽃은 피었다가 찰나에 사라져 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흔히 “비꽃을 뿌린다” “비꽃이 피기 시작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비꽃이 피는 소리를 들었는지, 점심 공양을 준비하던 보살 두 분이 마당으로 나와 급히 비설거지를 합니다. 열어 둔 장독을 덮고, 널어 둔 옷들을 걷습니다. 비가 싫지 않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연신 웃고 있습니다. 비꽃에 흠뻑 빠진 나는 그런 보살님의 모습도 꽃처럼 보였습니다. 
툇마루 끝에 앉아 떡과 과일을 먹던 대여섯 명의 산행객들은 비옷을 꺼내 입고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는 당고개역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차바위를 타고 주봉에 올랐다 도안사에 잠시 들렀다며 “안산하세요~”라는 인사까지 하는 걸 보니 정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안산하다’는 산모가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지만 산에서만큼은 ‘안전한 산행’을 말합니다. 
그들이 떠난 후 비는 “우르르! 후두둑!” 삽시간에 채찍비로 바뀌었습니다. 비바람에 절집 추녀 끝 풍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목어(木魚)도 오랜 침묵의 소리를 울렸습니다. 시인 홍사성이 읊은 것마냥 ‘밤낮으로 눈 뜨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목어의 존재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속창 다 빼고 /빈 몸 허공에 내걸렸다//원망 따위는 없다/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먼지 뒤집어써도 그만/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바짝 마르면 마를수록/맑은 울음 울 뿐”

속을 다 뺏기고 빈 몸으로 절의 누각에 걸려 있지만 그 누구에 대한 원망 따위는 없답니다. 살아 물속에 있었건만 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라네요. 강이든 바다이든 초월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겠지요. 나를 비우고 또 비우고 감정을 버리고 또 버리고…. 욕심과 집착을 던져버려야 진정 편안한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산사에서 소리들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관음(觀音)’이지 싶습니다.

비그이가 지루했던지 옆지기가 비옷을 꺼내 입으며 하산 준비를 합니다. 옆지기의 존재를 잊은 채 넋 놓고 절집에 앉아 있은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나 봅니다. 누군가에겐 ‘비그이’가 ‘외로운 시간’일 수 있음을 생각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토요일 오후, 학교에 혼자 남아 복도를 서성이며 비그이하던, 오래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비그이’는 비가 올 때 잠깐 피해 멎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정상을 찍지 않고 도시로 돌아가는 하산길은 몹시 아쉽습니다. 그래도 많을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산행이기에 성큼성큼 세상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비는 너무도 고마운 단비이자 약비, 복비였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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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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