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때, 반갑고 고마운 말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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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때, 반갑고 고마운 말

2019.08.06

나는 요즘 한여름 복더위에 1960년대 초의 어느 대학총장 강연록을 읽느라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열작업을 도와주고 있는데, 뜻을 알 수 없는 게 많아 고전 중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단어나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 자주 나오는 데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는 1960년대의 특정 상황이나 인명에 어두워 작업이 더딥니다. 우리 사투리나 일본어식 외래어 발음은 이리저리 두드려 맞춰 해독하고 있지만 전혀 땅띔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녹음상태가 안 좋아 못 적거나 잘못 기록한 곳도 많습니다.

골치는 머리나 머릿속의 속어입니다. 그런데 녹취한 글에는 이 말이 머리 두뇌 지혜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뭘 허겠다는 사람들은 다 골치가 동그스름해요.” “그 사람은 골치가 너무 좋아서” 이런 식입니다. 총명쟁이는 원래 타고난 골치가 좋거나 골치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재주아치는 재주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데, 재주도 골치와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이나 용모에 관한 말로는 질기둥이가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성질이 아주 끈질긴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론 점잖고 얌전한 사람에게도 불집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위험성이 있는 사물이나 요소가 불집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건드려 불집만 하나 더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성질이 나쁜 사람은 흉(凶)업다고 말하더군요. 말이나 행동 따위가 불쾌할 정도로 흉하다는 뜻인데, 흉없다가 아니라 흉업다인 점이 특이합니다.

옥니박이는 옥니가 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옥니는 안으로 옥게 난 이입니다. 그러면 옥다는 뭔가? 안쪽으로 조금 오그라진 게 옥은 겁니다. 요즘은 영양상태가 좋은 데다 치아 교정술이 뛰어나 옥니박이는 잘 보기 어렵습니다. 월탄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1954)에는 “무수한 왜적들은 한꺼번에 손발이 옥아 들면서 까맣게 타 죽어 버린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니다.

바둑용어에는 옥집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그라져 구실을 못하는 집입니다. 집의 모양이긴 하지만 참집이 아니어서 나중에 단수(單手)를 당해 메워지는 곳으로, 모양이 잘록하다 하여 잘록집이라고도 합니다. 옥여서 바싹 죈다는 ‘옥죄다’에도 옥이 나옵니다.

옥다에는 ‘장사 따위에서 본전보다 밑지다.’는 뜻도 있더군요. “재수가 좋으면 이삼 원, 옥아도 칠팔십 전.”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에 나오는 말입니다. 본전, 본밑천도 예전에는 본밑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나 봅니다. “밑져도 본밑”이라고 합니다. 

고수련은 무슨 뜻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참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앓는 사람의 시중을 들어주는 게 고수련인데,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 허공에 던지는 고수레와 어원이 같은지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요양원 병원 이름에 고수련이 많았습니다. 소설에도 제법 등장합니다. “이 병이 낫도록 고수련만 잘하면 회복 후 토지를 얼마 주리라는 언약을 앞두고 나의 팔촌형을 임시 양자로 데려온 그것만으로도 평온을 잃은 그의 심사를 알기에 족하리라.”(김유정 ‘형’) “애기 서는 사람 고수련하랴,그 대단한 법관사위 대접하랴 눈코 뜰 새 있을 줄 알아?”(박완서 ‘도시의 흉년’)

함함하다(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 소담하고 탐스럽다)도 좋은 말 같았습니다. “아 군인이 쓱 나오드니만드루 휘휘 둘러보드니만 함함한 여자가 있으니깐 따라가 버렸단 말야.” 이런 표현, 재미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그 힘을 빌리는 ‘청(請)질’이라는 말은 요즘 많이 쓰는 갑질과 함께 쌍둥이처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밖에 주보(酒甫·술을 몹시 마시거나 즐기는 사람) 속공(屬公·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따위를 관의 소유로 넘기는 것) 같은 단어도 쓰임새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문생활이 그동안 격변해왔고 정통 문법과 어법은 계속 파괴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세대가 쓰던 말은 이제 다 잊히고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됐습니다.

이 강연록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알게 된 거지만, 최근에 만난 말 중 가장 좋고 인상적인 것은 ‘글때’입니다.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몸에 밴 게 글때입니다. 나 같은 조고계(操觚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조고계는 한자 그대로 풀면 술잔을 잡는 사람들의 사회로,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 분야, 즉 문필계를 뜻합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더라도 글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글때라는 말을 잘 갈무리하면서 글이나 글씨가 더욱더 내 몸에 배기를, 그러나 글이나 글씨에 때가 끼거나 묻지는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스스로 점검하고 경계하게 하는 고마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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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손들지 않는 기자들‘,‘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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