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 해유?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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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 해유?

2019.07.30

“한 주발 향그런 차 조그마한 얼음 띄워/ 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겠네/ 한가하게 죽침(竹枕) 베고 단잠에 막 드는 차에/ 손님 와 문 두드리니 백번인들 대답 않는다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의 시 ‘삼복(三伏)’입니다. 시원한 꽃차로 더위를 씻은 후 달콤한 낮잠에 빠진 학자의 모습이 정겹게 그려집니다. 초복과 중복을 보낸 요즘 너무도 덥고 습해, 조상님의 말마따나 입술에 묻은 밥알마저 무겁습니다. 낮잠만으로는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일 저 일 다 냅다 던져 버리고, 김수장(조선 영조 때의 가인[歌人])이 읊은 것마냥 맑은 계곡을 찾아 옷 벗어 나무에 걸고 노래 부르며 옥같이 맑은 물에 세상의 먼지와 때를 씻고만 싶습니다.

삼복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입니다. “삼복더위에 쇠뿔도 꼬부라든다”는 속담이 있는 걸 보면 그 옛날에도 더위가 엄청났나 봅니다. 그런데 정말 쇠뿔이 꼬부라질 정도였을까요? 해학, 지혜와 더불어 ‘뻥’도 꽤나 센 조상님들 때문에 무릎을 탁 치며 웃습니다. 1970·80년대 한여름의 한낮, 식구들이 마당에 나비물만 뿌리면 시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세수를 하고 나서, 엄마와 언니는 걸레를 빨고 나서 나비물을 뿌렸습니다. 이맘때 마당가에 흐드러지게 피던 달리아(dahlia)는 식구들이 차례로 끼얹어주는 나비물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했지요.

나비물은 나비 날개 모양으로 옆으로 쫙 퍼지게 끼얹는 물입니다. 먼지 폴폴 날리는 마당이나 대문 앞 골목길에 먼지를 재우기 위해 나비물을 뿌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나비물은 나비잠(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나비처럼 자는 잠)과 더불어 내가 참 좋아하는 예쁜 우리말입니다.

그나저나 초복·중복에 뭘 드셨나요? “복더위에는 민어탕이 일품, 도미탕이 이품, 보신탕이 삼품”이라는 옛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낮밤으로 이어지는 가마솥더위를 이기려면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찾아 먹어야 합니다. 음식에 순위를 매길 만도 하지요. 땀으로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려면 물도 충분히 마셔야 하고요. “더위만 빼고 골고루 다 먹자”는 말이 딱입니다.

애호가들은 벌써 몇 그릇 뚝딱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신탕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때면 곧잘 듣던 질문 “개 혀?”를 올해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개 혀?”가 무슨 말이냐고요? “보신탕(개고기) 먹을 줄 아느냐”고 묻는 충청도 사투리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는 ‘복수형’도 있습니다. “개들 혀?”

사회 분위기 탓일까요. “보신탕 먹으러 가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만큼 보신탕 인구가 줄었다는 방증이겠지요. 보신탕 인구가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반려동물 (사육) 인구 1,000만 명 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2012년 17.9%에서 2017년 28.1%로 증가했습니다. 반려동물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2조8,900억 원으로, 2015년(1조8,000억 원) 대비 60.5%나 상승했습니다. 애완견을 위한 호텔·놀이터·카페에, ‘개모차’를 끌고 다니는 이의 모습도 낯설지 않습니다. 독(Dog)TV, 반려견 신용카드, 뇌와 관절 건강에 좋다는 노령견용 사료, 장례업체까지 등장했으니,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입니다. 이런 세상에 ‘보신탕’ 운운했다간 야만인 취급받기가 십상이지요.

그런데 나는 ‘개고기 문화 = 야만’이라고 주장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보신탕이 혐오식품이 되긴 했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개고기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애매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먹든 말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게다가 식견(食犬) 문화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굳이 야만·혐오 등 부정적인 말들로 누군가를 할퀴지 않더라도 곧 사라질 것입니다. 

다만 먹거리가 풍부한 요즘, 보신탕만으로 건강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매우 시대착오적입니다. 논란거리가 되지 않으면서도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요. 추어탕, 장어탕, 염소탕, 마라탕, 오리탕, 삼계탕, 전복죽, 냉면, 콩국수, 메밀국수….

오늘 나는 복날과 상관없이 실한 놈으로 촌닭 한 마리를 사다가 황기, 대추, 밤, 당귀, 찹쌀을 넣고 푹 끓여 먹으렵니다. 권오범의 시 ‘삼계탕’이 맛을 더할 것 같습니다.

“머나먼 저승길 허기질세라/대추 밤 찹쌀 미리 얻어먹고/지옥 물에 목욕재계하고 나니/골수 녹아내려 녹작지근한 몸뚱어리/인삼 하나 끌어안고/볼썽사납게 다리 꼬고 누워/누드쇼는 하지만/버젓한 한류스타이기에 여한은 없다/젓가락으로 잔인하게 꼬집어도 좋으니/뼈 마디마디 깔끔하게 해탈시켜주길”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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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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