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달진 곳의 슈퍼히어로들 [김창식]




www.freecolumn.co.kr

응달진 곳의 슈퍼히어로들

2019.07.08

동네 슈퍼 앞을 지나는데 초등학교 아이들 서넛이 어벤져스 캐릭터 흉내를 내며 놀고 있어요. 인피니티 스톤이 박힌 악당 타노스의 장갑을 끼고서요. 한 번 손짓(핑거 스냅)으로 세상의 반을 날려 보낸다는 저 무시무시한 죽음의 손 말이죠.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귀여워 소싯적 생각이 나는 터에 나 또한 유치한 면이 없지 않은지라 “어벤져스 어셈블!” 한 소리 외치며 모둠에 끼어들었답니다.

‘어벤져스 어셈블(Avengers Assemble, 어벤져스 헤쳐모여)!'은 팀 리더 캡틴 아메리카의 시그니처 대사예요. 각지에 흩어져 있는 히어로들을 규합, 악당에 대항하려 전의를 다지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 어려운 영어 대사를 알아듣고 환호성을 지르며 친밀감을 표시하더라니까요. “헐, 대~박!” 나와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 파이브를 하질 않나, 내게 허리를 반으로 꺾는 3G 폴더폰 인사를 하질 않나.

한 아이는 자신이 학교에서 어벤져스에 대해 두 번째로 많이 안다고 자랑을 해요. 그럼 누가 제일 많이 아느냐고 물으니 그건 비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타노스가 알면 큰일난다네요. 무리에 섞여 한바탕 수선과 부산을 떨다 자리를 떠나려 돌아서는 내 등짝에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와 닿아요. “아저씨 대단하다. 우리하고 말이 되네.” “뭔 아저씨야? 할아버지구만.” 내가 돌아서서 분연히 외쳤습니다. "아이 엠 할벤져스!"

잘 나가는 신세대 감성의 마블 히어로들은 그렇다 해도 왕년의 정통 보수 히어로들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DC 코믹스의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 올드 패션 영웅들이 금분세수(金盆洗手, ‘은퇴’를 뜻하는 무협 용어)하여 마냥 두문불출(杜門不出)한 것은 아닙니다. <슈퍼맨 리턴스> <배트맨 다크나이트>처럼 시리즈의 스핀 오프와 리부트로 심심치 않게 선을 보였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죠.

왜 이들이 관심권에서 멀어져 한물간 영웅들이 되었을까? 무엇보다 영웅들의 면면이 노후화한 데다 구시대적이어서 급변하는 시대상과 세태 변화에 적응치 못한 탓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쳇말로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역으로 주 관객층인 젊은이들에게 먹히지 않은 탓입니다. 유머도 있고 경박함이나 허당끼 같은 인간적 약점도 있어야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아니겠어요? 경위야 어떻든 7080세대 일원으로서 응달진 곳에서 재기를 노리는 정통 보수 히어로들에 대한 향수와 연민을 어찌할 길이 없군요. 캐릭터 면면을 코믹 터치로 살펴봅니다.

슈퍼맨(크리스토퍼 리브 외):

.

.

지구방위대 사령관. 직업은 신문 기자. ‘엄친아’ 이미지지만 ‘별 그대(별에서 온 그대)’여서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시달리기도 함. 수정 얼음으로 만들어진 별 크립톤(Krypton)이 고향인데, 행성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아기 때 지구로 보내져 캔사스 농장에서 양부모에 의해 길러짐. 어릴 적  뿌리를 찾아 가출해 비행(非行, 飛行)소년이 되어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은 적도 있음. 가끔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위버멘쉬(Uebermensch)'와 혼동되는 것이 불만이지만 출신과 성분이 전혀 다름. 신체 건강하고 믿음직스럽지만 촌티 나는 패션 감각(쫄쫄이 내복)이 흠이라면 흠.

배트맨(마이클 키튼 외):

.

.

'간지'나기로 따지면 뭇 영웅 중 최고. 고담시 밤하늘에 떠오르는 푸른색 배트맨 문양을 배경으로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망토를 펄럭이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끝내줌. 어렸을 적 부모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트라우마는 두고두고 배트맨을 괴롭히며 악당들에게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구실을 제공하기도 함. 결과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딜레마에 빠짐. 평소 신분은 대재벌이어서 작심하고 갑질을 일삼는다면 아무도 못 말리겠지만 사실은 자폐성 외톨이임. 음울하지만 ‘에지’ 있으며 비밀스런 매력남. 하지만 결혼 상대자로는 글쎄요?

원더우먼(린다 카터 외):

.

.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로 미스 유니버스 출신. 1970년대 TV 시리즈로 방영되며 인기를 모음.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만 성격이 드세지 않고 ‘샤방샤방’해 호감을 샀음. 자연치유 능력이 있다거나 황금 밧줄과 총알 막는 팔찌를 차고 있다든지 하는 초능력과 장비는 관심 밖. 압권은 빙그르르 한 바퀴 돌거나 회전문을 통과하며 수시로 입고 나오는 수영복 몸매. 만인이 흠모했지만 언감생심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이 뻔한 원더우먼을 보통 사람들은 ‘신포도’에 비겨 ‘언더우먼’이라고 비하하기도. 육백만 불의 사나이 스티브 오스틴을 좋아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 위 사진들은 네이버 영화에서 따온 스틸 컷임.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