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김창식]


나를 위한 변명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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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변명

2019.03.04

나의 생김새가 단정한 느낌을 주면서도 조금은 닫힌 구석이 있어 보이는 모양입니다. 며칠 전 문학 심포지엄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였습니다. 전에 한두 차례 본 적이 있는 옆자리 사람이 무슨 말끝에 넘겨짚어 물어요. “교회 다니시죠?” 돌이켜 보면 그런 일들이 전에도 있었답니다. “바둑 잘 두시나요?” “수학 선생이신가 봐요?” 나는 당황하며 얼굴을 붉힙니다. “아, 아닌데요. ” 그러면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합니다. 덧붙이는 마음속 말이 짐작됩니다. “이상하다. 깐깐한 게 꼭 그 계통인데….

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주민등록증을 꺼내봅니다. 입을 앙다문 낯선 모습의 ‘노인성’ 중년사내가 마주 쳐다봅니다. 처량함이랄까 조금은 헛헛함이 묻어나기도 하는 얼굴이에요. 사실 주민등록증의 신상정보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박제된 나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요. 또 가끔은 거울을 보며 나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거울 속 내 오른 쪽 얼굴과 왼쪽 얼굴은 뒤바뀌어 있기 마련이죠. 거울 속 모습은 과학적으로도 허상에 지나지 않잖아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 계통의 전문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자아(self)'를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제1 자아인 이드(id)는 본래의 자아로 특별한 에너지가 없는 무색무취의 본성입니다. 제2 자아인 페르소나(persona)는 남에게 보이는 사회적 자아, 그러니까 가면 쓴 얼굴이에요. 한편 제3 자아인 슈퍼에고(super-ego)는 도덕이나 종교의 가르침으로 내면에 형성된 양심의 소리여서 제1 자아가 발호, 준동하는 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가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프로이트의 분류에 제4 자아와 제5 자아를 덧붙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4 자아는 반동자아(reactionary-self)로서, 특히 제3 자아에 반하는 성향으로 표출되는 수가 많습니다. 때로 과장스럽고 억지스럽거나 위악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요.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또는 “아,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의아해 하며 놀라는 순간의 양태입니다. 제4 자아를 통해 타인들은 근엄함과 윤리의 속박에서 풀려난, 날것 그대로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기도 합니다.

제5 자아는 무의식적 자아(subconscious-self)로서 위에서 설명한 모든 자아와 관련이 없거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아입니다. 밑바닥 의식의 조종을 받는 자아인 만큼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음주가 지나쳐 블랙아웃 상태가 되거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이해와 파악이 불가능한 숨겨진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요? 범위를 넓히면 다중인격장애,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 병리적 현상 또한 제5 자아의 범주에 포함될 법도 합니다.

마음이나 자아는 애초에 체계화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마음속 마음인 ‘참나(眞我)’에 대해서는 불교에 의지하여 화두를 풀어감이 마땅할 듯합니다. ‘참나’에 대한 대덕 고승들의 말씀들을 접해보면 요지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지요. “‘참나’는 선험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며, 일상에 진리의 도가 있으니, 세상과 내가 한 몸이 되어 여여(如如)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목전에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 이를 깨우치면 망아(忘我)에 이른다. 이것이 불성(佛性)에 다름 아니며, 이에 닿기 위해서 일생을 통해 수행, 또 수행할 뿐이로다.”

스님의 말씀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달을 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그것도 심드렁히 엿보는 것이 습관화된 이 가엾은 저잣거리 중생은 다시 묻습니다. “스님, 그러니까 참나가 도대체 무엇인가요?” 스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십니다. 이심전심. 깨닫고 느끼라는 가르침으로 헤아릴 수밖에요. 때로 죽비로 등을 후려치며 호통하는 스님도 있을 법합니다. “이놈아, 다 말했는데 또 무엇을 말하라는 것이냐!” 설핏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혹 스님도 ‘참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짐짓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닐까? ‘참나’의 존재를 알면 스님은 이미 부처가 되었을 테니.

아, 당신은 누구시며 이 몸은 누구인가요? 나는 때로 고아처럼 느끼고 내가 아닌 것처럼도 느낍니다. 가끔 수령이 오래된 나무를 마주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파도치는 해변에 나가 외치고도 싶고요. “파도야, 파도야, 너는 아니?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물음은 골목을 휘돌아 나가는 한 줄기 소슬한 바람에게도 향하지만, 바람에 대한 하소연은 무위로 끝날 수밖에. 바람은 원래 자신에 대해 무심하잖아요. 대상을 움직여 언뜻언뜻 존재를 드러낼 뿐. 그런데 파도는 자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기나 할까? 바람은 또 어디로 불어가는 누구인 것일까?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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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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